ep28.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을 아이맥스로 보기 위해 용산역에서 만난 날.
용산역은 서로 집에서 멀기 때문에 잘 가지 않는 동네다. 처음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온 용산역에서 우리는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카페에 앉아 레디 플레이어 원에 대한 후기를 서로 나누며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어둠이 슬금슬금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번 지기 시작한 해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전철을 타러 가기 전에 우리는 카페 밖 건물 안에 있는 화장실을 찾아갔다. 시간이 늦은 큰 빌딩에는 사람도 다니지 않았고, 경비 아저씨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상가 손님들을 위한 1층 화장실만 열려있었다.
나는 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는 화장실을 가지 않고 밖에서 기다렸던 것 같다. 왜냐면 내가 들어간 순간부터 들리기 시작한 그의 구두 굽 소리는 내가 손을 씻고 나올 때까지 멈추지 않았으니까.
사실 그는 맨날 그랬다. 매일 화장실 밖에서 구두 굽 소리를 내고 있다. 그런데 이 날은 대리석 바닥과 그의 구두 굽의 케미가 환상적이었는지 유독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왜 저렇게 왔다 갔다 거릴까. 왜 저렇게 시끄럽게 소리를 내고 있을까? 저 정도면 일부러 그런다 싶을 만큼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왔다 갔다 거리며 구두 굽 소리를 냈다.
갑자기 예전에 여의도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여의도 공원에는 이동식이지만 나름 깔끔하게 잘 유지되고 있는 화장실이 있다.
이동식 특성상 문 하나로 화장실 안과 밖이 구분되어 있는 그런 화장실이다. 그때 나는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정말 깜짝 놀랐었다. 그가 바로 앞에 서있었기 때문에!
그때 나는 ‘뭐야 왜 바로 앞에 서있어 놀랬잖아’라며 당황했었다. 이런 상황도 떠오르자 이번에는 왜 자꾸 바로 앞에 있냐고 왜 왔다 갔다 거리고 있냐고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왔다 갔다 거리고 있어. 소리 다 들리게”
내가 나올 때까지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움직이던 그는 내 말에 바로 대답했다.
“어디 안 간다고 안심시킬라고”
‘하’ 가슴 밑에서부터 올라온 깊지만 짧은 감탄사가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나 때문에 그런 거였구나. 그제서야 평상시 공공장소에서는 시끄럽게 소리 내는 것도 싫어하던 그의 성격이 기억났다. 아까 생각했던 여의도 에피소드에서도 ‘왜 앞에 서 있냐’는 내 핀잔에 ‘공중화장실은 위험한 걸’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답하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만나면 만날수록 날 더 사랑해주는구나 느끼게 해주는 것. 만나면 만날수록 더 괜찮은 사람이구나 깨닫게 해주는 것.
그런 그와 내가 연애를 한다는 것.
이게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내가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사랑에 빠져서가 아니라 그가 정말 멋진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