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은 생후 33개월이다. 미운 네 살이라곤 하지만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요즘은 말도 어찌나 잘하는지 하루하루 사용하는 언어가 늘어가는 게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점점 클수록 나를 더 닮아가는 게 신기하기도 한데, 어느 날 직장 후배가 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업데이트된 우리 딸 사진을 보고는 말했다.
"과장님, 딸이 크면 클수록 더 과장님 닮아가는 것 같아요!"
내가 봐도 나랑 똑 닮아서 후배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첫째 딸은 아빠 닮는다는데,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정말 그런 것 같았다.내가 생각해도 날 닮은 딸을 보고 있노라면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했다. 이런 양가의 감정을 갖게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내가 물려준 유전자 때문이다. 인터넷 강의로 유명한 한 강사는 14년 간 학생들을 봐오면서 정작 공부에서 중요한 인자는 유전자라고 말한다. 80프로 이상으로 유전자의 힘이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나도 이 의견에 상당 부분 동의하는 바이다. 공부뿐만 아니라 건강, 생활 습관, 성격, 기질 등 유전자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꽤 많은 관여를 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과연 아이에게 얼마만큼의 내 좋은 유전자와 나쁜 유전자를 물려준 것인지 가늠해 보게 되었다.
아이를 지금껏 키워오면서 나는 아이에게 어떤 좋은 유전자를 물려주었을까. 우선 어린이집 선생님들에게 항상 듣는 말이 있다.
"똥이는 항상 밝아서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요!"
이 말을 들은 아빠는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처음엔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어린이집을 옮기고 반을 바꿀 때마다 만나는 선생님들 마다 일관되게 얘기하고 있어서 난 꽤 의미 있는 얘기로 받아들였다.밝고 긍정적인 기질은 내가 물려준 가장 좋은 유전자인 것이다. 물론 아내도 부정적인 성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그리 밝게 보지도 않는 편이다. 나는 대체로 태어난 김에 행복하게 잘 살아보자는 식이므로, 아이도 나의 이 마인드를 물려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는 아이가 잘해오고 있어 대견한 마음이다.
두 번째로 좋은 유전자는 아마도 건강 유전자인 듯싶다. 나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체력과 건강이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좋은 편인데, 특히나 장이 건강하여 먹는 대로 흡수하는 효율(?)이 꽤 좋은 편이다. 그래서 살도 잘 찌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튼튼하고 건강한 축에 속한다. 아이도 체력과 건강이 남다르다. 지금껏 아이라면 한, 두 번쯤은 간다는 응급실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감기는 꽤 많이 걸렸고 열이 올랐어도 해열제와 약을 먹으면 항상 다음 날에는 잘 이겨내었다. 밥을 안 먹는 아이와 편식하는 아이로 인해 걱정이 많은 분들도 있지만, 우리 아이는 밥도 골고루 잘 먹고 특히나 미역국, 생선, 콩나물, 시금치를 좋아해서 크게 걱정이 없다. 이런 밥심으로 끊임없이 뛰어다닌다. 딸이지만 가만히 앉아서 뭔갈 하는 것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요즘엔 자꾸 내 몸을 올라타서 어깨 위까지 올라가 천장에 본인 손이 닿는 것을 뿌듯해하는데, 나는 아이가 떨어질까 봐 손으로 받치고 있느라 체력이 고갈 나고 있다.
반대로 내가 아이에게 물려준 안 좋은 유전자도 있다. 자꾸 나에게서 전달받은 나쁜 유전자를 아이가 보여줄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중 첫 번째로는 겁이 많다는 것이다.일단 집을 나서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 아이는 무서운지 떼가 엄청 늘어난다. 또한 장모님은 자주 봐서 상관없지만 자주 못 보는 우리 부모님과 내가 통화만 해도 엄마 뒤에 숨어버린다. 당연히 낯선 어른들은 쳐다보지도 못한다. 네 살이지만 놀이터에서도 미끄럼틀이 좀만 높으면 못 타고, 아직 그네는 시도도 못해봤다. 시소는 혼자 타긴 하는데 반대쪽에 내가 타려고 하면 강하게 손사래를 친다. 내가 올라타면 시소가 높게 올라가서 무섭다는 것이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놀이공원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아마 아이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여서 걱정이 앞선다. 나는 내가 그러지 못해서 아이가 좀 더 세상을 도전적으로 살았으면 좋겠는데 '겁 유전자'를 물려줘놓고 괜한 욕심만 부리는 건가 싶기도 하다. 조금이라도 아이가 겁을 줄이고 세상을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서포트해줘야 하겠다.
앞서 좋은 유전자로 건강 유전자를 얘기했는데 이와 반대로 '단 맛 중독 유전자'를 물려준 것 같아 걱정스럽다. 최근 설탕이나 과당같이 단 맛이 나는 것들이 술처럼 간에 심각한 손상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는 기사를 읽으니 더욱 그렇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초콜릿, 아이스크림 등 단 것을 엄청 좋아했다. 어렸을 적 동네 구멍가게에 가면 항상 초콜릿을 먼저 골랐고, 생일이면 초콜릿 케이크를 사달라고 졸랐다. 다른 애들이 너무 달아서 싫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거의 당 중독 수준이었다. 요즘도 술에 취하면 항상 아이스크림으로 해장을 하는데, 이게 간에 얼마나 많은 무리를 주는 건지 최근에 깨달았다. 지금 우리 아이도 네 살인데 벌써 단 것을 너무 찾아서 나처럼 당 중독이 올까 봐 우려스럽다. 게다가 나처럼 치즈나, 두유, 우유 등 유제품까지도 너무 좋아해서 소아 비만도 걱정된다. 지금은 다행히 활동량이 많아서 그런가 영유아 건강건진에서 이상은 없지만, 아이가 원하는 대로 다 주다 보면 살찌는 건 시간문제라는 생각에 요즘 아이의 식습관을 잡아주려고 애쓰고 있다.
유전자의 힘은 놀랍다. 특히 나를 많이 닮은 아이에게서 수시로 나타나는 나의 유전적 기질을 보는 것은 정말 신기한 경험이다. 우리 어머니도 나를 보며 이런 마음이 들었을까. 사실 아이에게 건네준 유전자를 내가 선별해서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나름의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여서 전달되어 있다.
이와 같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아이에게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방법은 나에게서 받은 좋은 유전자를 내 경험을 보태어 더욱 키워주고, 나쁜 유전자는 개선 방안을 함께 찾아서 같이 시도하고 노력해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좋고 나쁜 유전자들이 내가 살아온 삶동안 습득한 사회화로 어느 정도 가려져 있지만, 나의 내면에서는 우리 아이처럼 그대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나중에 컸을 때 나를 많이 닮은 것을 원망하지 않도록 아내보다 더 큰 책임감으로 아이의 기질을 돌봐야만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