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프러포즈를 한 뒤 결혼을 결심하고부터 우린 만나기만 하면 결혼에 대한 얘기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함께 행복한 미래를 그린다는 것 자체로 행복했다.없는 예산에도 어떻게든 최대한 갖춰보려고 노력했다. 일명 '스드메'라고 하는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은 아내가 스스로 알아서 자신에게 맞는 최적의 것을 골라내었다. 그전에 결혼식장부터 미리 예약을 했었는데, 아내 직장 동료가 결혼하는 날에 내가 따라가서 그 결혼식장을 함께 둘러봤었다. 결혼식장에서 내가 중요하게 보았던 것은 식사와 주차였고 아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식장 분위기였는데, 그 결혼식장은 얼추 교집합이 성립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당일에 상담을 받고 8월 말 날짜로 예약을 해버렸다. 비수기에 속해 가격이 저렴했기도 하고 여름이 한 풀 꺾이는 시기라 덥긴 하더라도 그나마 좀 나을 것이라 여겼다.
결혼식장을 예약하니 일사천리로 많은 준비들이 아내 주도로 착착 진행되었다. 스드메는 말할 것도 없고, 이때 처음 알았는데 플래너와 헬퍼 이모님이라는 결혼식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보조해 주시는 분들도 섭외를 해야 했다. 아마 이때쯤 양가 부모님들께도 각자 결혼을 하겠다는 얘기를 나누고선 날을 잡아 상견례도 했었다. 고급스러운 한정식 식당을 예약하고, 부모님들을 모셨다. 어색한 분위기에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부모님들은 우리들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고, 각자가 하나뿐인 자식들이라서 걱정과 덕담 위주의 얘기들을 나누었다.
상견례까지 마치고 나니 본격적으로 집안 대 집안으로 준비를 해야 할 것들이 시작되었다. 바로 신혼집과 혼수 그리고 예단, 예물 같은 것들이다. 이때부터 슬슬 서로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거추장스러운 절차들을 최대한 생략하고 싶어 했지만, 부모님은 그동안 해온 방식대로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아내도 한정된 예산 안에서 쥐어 짜내 어떻게든 절차들을 모두 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결혼식을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하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결혼식을 준비하고 행하는 데 있어 가장 행복한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은 나와 아내, 즉, 신랑과 신부여야 함이 마땅한데, 이미 한국의 결혼 문화는 신랑, 신부는 그저 꼭두각시일 뿐 전통적인 집안 행사가 되어버린 듯했다. 이렇게 결혼 준비를 하던 2016년 당시에도 스몰웨딩이 각광받고 있긴 했지만, 정작 주변에서 가볍게 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결국 예물과 예단은 각자 집에서 알아서 하기로 하고, 집안끼리 무언가 오가는 행위는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부모님들끼리는 서로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항상 걸림돌은 예산이었고, 양 가의 경제적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방식으로 끌고 갈 수 있었다. 혼수는 아내 주도로 준비하고, 어차피 대출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전셋집은 내 주도로 알아보았다. 그러나 알아볼수록 눈만 높아지고, 자본주의의 벽에 부딪쳐 좌절하기만 했다. 이 때는 정말 다 포기하고 "그냥 결혼식 하지 말고 시골 내려가서 살자"라는 말까지도 입 밖으로 나왔었다. 아내와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부모님과도 갈등이 생겨 집을 뛰쳐나가기도 했다.
겨우 겨우 엉성하게 갖출 것이 어느 정도 갖춰진 결혼식 당일이 찾아왔다. 새벽부터 일어나 메이크업과 드레스를 준비했다. 막상 신랑이 할 일은 별로 없다. 머리랑 눈썹만 몇 번 만지고, 그저 신부가 준비가 다 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할 뿐. 그래도 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식 중간에 아내가 바라던 축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다듬고 노랫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결혼식장에 한 시간가량 전에 도착해서 결혼식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꽤 찍었다. 벌써부터 억지로 웃느라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려왔고 입은 바짝 말랐다. 리허설로 식장 안에서 노래 한 번 부르고, 신랑 대기 장소에 서 있으니 아는 얼굴들이 한 두 명씩 들어와 인사를 나눴다. 친척들과 친구들, 회사 동료들과는 반갑게 인사했지만, 부모님 친구분들과 직장 동료분들과는 어색하게 인사했다. 얘기를 나누고 억지로 미소 짓고 게다가 긴장까지 하고 있으니, 입 안은 거의 사막이 되어 물을 아무리 마셔도 입술이 촉촉해지지 않았다.
드디어 신랑 입장.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행진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환한 조명이 비추고 있는 곳까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중간중간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레 걸어가려고 노력했다. 아내가 들어오는 순간. 아버지가 안 계시는 아내의 옆에는 큰아버지가 서 계셨다. 아내도 역시 긴장한 표정이었고, 나는 어느새 중간쯤에서 아내를 맞이했다. 주례를 하는 동안에도 난 내가 부를 축가 생각 밖에는 없었다. 축가만 아니었어도 이 정도까지 긴장하진 않았을 텐데...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주례가 막바지에 치달았고, 아내의 친구들의 축가가 먼저 있었다. 잘 듣지는 못했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사회자가 신랑의 축가가 있겠다는 말을 하자 환호성이 들려왔다. 난 그동안 코인 노래방에서 연습한 축가 <지금 이 순간>이라는 뮤지컬 노래를 불렀다. 긴장한 나머지 중간에 가사를 틀렸음에도 하객들은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었고, 무사히 축가를 마칠 수 있었다. 아내의 흐뭇한 미소를 보니, 그래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 가 부모님과의 인사를 끝으로 마지막 행진만이 남았다. 긴장은 많이 풀려 있었고, 지긋지긋하게 준비했던 결혼식이 끝나간다는 생각에 후련한 마음마저 들었다. 행진과 사진촬영까지 다 마치고 하객들은 식사를 하러 갔다. 하지만 우리는 폐백이 남아있었고,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라 어떻게 치렀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사진도 찍었고 친척들에게 절값도 받았다. 너무나 지쳐 배고픈 것도 몰랐다. 식당에 가서는 앉아서 식사하고 계신 하객들과 돌아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나눴고, 술도 한, 두 잔씩 하게 되었다. 거의 일 년 동안 지을 웃음을 결혼식을 하며 다 지은 듯했다. 하객들이 대부분 빠져나가고, 우린 빈자리를 찾아서 식사를 했지만, 잘 넘어가진 않았다. 빨리 먹고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처음부터 끝까지 전 결혼식 과정은 한 시간이 채 넘지 않았는데, 이를 준비하느라 소모한 시간과 돈과 에너지는 엄청났다. 그러고 나서 결혼생활 7년이 흘렀지만, 그때 찍은 사진과 영상은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다.
'평생에 한 번뿐'이라는 생각으로 결혼식을 준비하게 되면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에 신경을 쓰게 된다. 스튜디오 촬영 날 사진작가의 간식도 챙겨가야 하고, 이미 비용을 지불했음에도 이모님의 수고비를 따로 준비해야 한다. 결혼 후 살쪄서 입지도 못하고 회사에서 입을 일도 없는 정장을 맞춤으로 하게 되고, 평소에 차지도 못하는 시계를 비싼 돈 주고 사게 된다. 내가 지금 다시 결혼식을 준비한다면 쓸데없는 시간과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세 가지 정도만 챙겨서 후회하지 않도록 선택과 집중을 하고 싶다. 나에겐 이미 지나간 일이긴 하지만 한국사회의 결혼식이라는 제도는 결국 나를 위한 행사라기 보단 부모님과 집안 행사라는 느낌이 강하다. 누구를 위한 결혼식인지 잘 생각해 보고, 그 과정 속에서도 실제 결혼을 하는 당사자들이 행복한 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준비하면 좋겠다, 너무 복잡하고 번거로워서 괴롭고 힘들기만 하다면, 그 결혼식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래도 꼭 해야 한다면 스몰웨딩과 파티 형태의 간소화된 서양식 결혼 문화도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