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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Apr 16. 2024

엉성하고 허술한 프러포즈

제 아내는 흙수저 출신입니다. (ep. 11)

  드디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그러나 오기 전에 프러포즈 반지를 사두었던 것을 그녀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래도 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바르셀로나에 가자고 말을 꺼낸 순간 그녀는 나의 목적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강 얼버무리며 수습을 하고선 겨우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었다. 먼저 미리 예약해 둔 호텔로 이동해서 짐을 풀었다. 첫날은 가볍게 호텔 근처를 둘러보며, 바르셀로나 분위기를 익혔다. 장시간의 비행과 시차로 인해 우리는 금방 숙소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일정을 위해서라도 일찍 잠들어야 했다. 아침부터 가우디 투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여행 이튿날 아침부터 부랴부랴 투어 모임 장소로 나갔다. 다른 한국인 커플들과 여행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우린 그 무리에 어색하게 합류했다. 가우디 투어는 바르셀로나 곳곳에 숨겨진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양식을 둘러보는 관광 코스다. 건축 디자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로서도 특유의 가우디 양식은 한눈에 들어왔다. 그만큼 다른 주변 건축물에 비해 독특한 형태를 띠었다. 중간에 점심식사를 한 뒤 가우디 투어의 하이라이트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으로 향했다. 관광 명소라 그런가 역시나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성당을 처음 본 순간 그 웅장함에 잠시 말을 잃었다. 아직 공사 중이라 주변으로 대형 크레인이 있었지만, 이 또한 나에겐 성당의 멋을 더하는 데 훌륭한 장식품이라 생각되었다. 웅장함에 익숙해질 때쯤 디테일한 디자인들과 장식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또다시 나에게 놀라움을 주었다. 왜 그녀가 그렇게 이 성당을 보고 싶어 했는지 이젠 알 것 같았다. 그녀 역시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넋이 나가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프러포즈를 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사람도 너무 많고 투어 일정도 빡빡해서 어떻게 프러포즈 타이밍을 잡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에서 평생의 동반자가 될 것을 약속하고 반지를 끼워주는 것. 간단해 보였지만, 성당은 그런 로맨틱한 분위기보다는 시장 바닥 같은 분위기여서 막상 프러포즈를 실행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내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여유롭게 더 보자고 말하며, 프러포즈 계획도 내일로 미루었다. 좀 더 여유롭게 시간을 두고 둘러보면, 적당한 프러포즈 타이밍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주머니 속 반지는 말없이 뒹굴거리고 있었다.



  전날의 가우디 투어로 지쳤던 우리는 여행 셋째 날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났다. 자유 일정인 오늘은 해변가 산책을 한 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 시간을 쭉 보내기로 했다. 저녁엔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을 예약해 놓았고, 맛있는 음식과 술로 바르셀로나 여행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물론 이 중간에 프러포즈를 꼭 성사시켜야만 했다. 문제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으로 가는 길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비가 오는 분위기도 나름 낭만이 있었지만, 프러포즈를 하기엔 그리 적합하지는 않았다. 성당 내부는 너무 어두웠고, 성당 바깥은 너무 축축했다. 우린 잠시 쉴 겸 성당이 보이는 1층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비를 맞고 있는 웅장한 성당을 말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린 이 여행의 정수를 맛본 느낌이었다. 프러포즈는 또다시 밀렸다.


  저녁에 도착한 레스토랑은 역시나 분위기가 낭만적이었다. 딱 프러포즈하기 좋은 장소라 생각되었다. 음식을 먹으며 기분 좋은 배부름이 생기고, 술이 어느 정도 분위기를 유연하게 만들어 줄 때쯤 프러포즈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주섬주섬 반지와 편지를 꺼내면서 그녀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9시가 겨우 넘어가는 이른 밤이었음에도 그녀는 잠이 쏟아지는 듯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로맨틱한 분위기는 그녀에겐 자장가와 같았다. 나는 빠르게 편지를 읽는 둥 마는 둥 하고, 그녀의 힘 풀린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줄 알았지만, 하품을 너무 크게 한 나머지 눈물이 찔끔 나오는 것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고마워, 근데 너무 졸리다."

"어... 그래, 이제 숙소로 돌아가자."


뭔가 마음속에서 프러포즈 준비를 많이 했지만, 후루룩 지나간 것 같아서 시원 섭섭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의 대답은 긍정인 것이었고, 나도 후련한 마음으로 오늘만큼은 푹 잘 수 있을 것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어둡고 쌀쌀했지만, 그녀가 이제 평생 내 옆에 있을 거라는 생각에 난 그 속에서도 훈훈한 달빛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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