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어머니는 전라도 광주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처음 만났다고 했다. 그는 그때 당시 키가 크고 훤칠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사진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외모가 그를 똑 닮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끔 거울을 보면 그가 떠오를 때가 있다고 했다. 그는 그 시절 대학도 나오고 카투사를 전역하여 영어도 곧잘 했다. 당시 취업이 쉽기도 했지만, 그는 그가 갖고 있는 역량으로 유명 건설사에서 일했다. 그가 받는 월급은 보통 이상이었다고 했다. 그런 모습들에 반해 그녀의 어머니는 일찍이 그와 결혼을 결심했다.사실 결혼식을 올리기 전 이미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 뱃속에 있었다.
그의 일자리로 인해 그녀의 어머니는 서울로 상경하셨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자리를 잡아 아이를 키우며 사는 단란한 가정을 꿈꾸셨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는 잘 다니던 건설사를 상의도 없이 하루아침에 그만두었다. 일이 자기와 맞지 않다며, 다른 일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녀는 그가 조직 생활에 어울릴 수 없는 그런 성향을 갖고 있던 것 같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어둠의 그림자가 그녀의 어머니를 옭아 매기 시작했다. 그는 일용직을 전전하며 하루하루 일당을 받았지만, 도박에 빠져 이미 태어난 그녀의 기저귀 값조차 어머니에게 주지 못했다. 그는 가장으로서의 어떠한 책임감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어머니는 아이를 키우느라 일자리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고, 본인이 잘 아는 식당에서 일을 가끔 도우며 근근이 생활했다.
결국 터진 건 그녀가 초등학교를 들어간 직후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따금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셨고, 도저히 버티지 못한 어머니는 집을 떠나셨다. 홀로 남겨진 그녀,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 단 둘이서만 살게 된 것이다. 다행인 건 그는 그녀에게만큼은 손찌검을 하지는 않았다. 그 시절 한 가정에서 어머니가 없고, 아버지만 있다는 것은 아이가 제대로 케어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녀는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등교했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해서 더욱 말라갔다. 언젠가는 그가 우유를 섞은 음식을 만들어 그녀에게 먹였는데, 그녀는 맛이 너무 없어서 먹지 못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그녀에게 억지로 먹게 했는데, 결국 그녀는 다 먹지 못하고 구역질이 나와 토하고 말았다고 했다. 그녀는 지금도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
그녀가 그 어린 시절 그래도 의지할 곳은 그의 곁이었다. 그녀를 내버려 두고 떠난 어머니를 처음엔 원망하였지만, 자라면서는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가 며칠씩 집을 비우는 날에는 혼자서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고작 8살인 그녀는 알아서 무언가를 챙겨 먹어야 했고, 밤에는 스스로 잠을 청해야 했다. 다행히 가끔씩 그녀의 어머니가 음식을 싸들고 찾아와 그녀에게 전달해 주고는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녀는 그때만 하더라도 어머니가 한 푼도 없이 집을 나가서 어디서 생활하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그녀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무렵 여느 때나 다름없이 그녀의 아버지가 집에 없을 때에 맞춰 그녀의 어머니가 집에 오셨다. 이때만 하더라도 집에 전화기가 한 대씩 있어서 어머니는 미리 집에 전화를 걸어 누가 받는지 확인을 하고 오시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날만큼 유독 어머니가 다시 돌아가는 게 싫었다. 그녀는 돌아가려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말했다.
나 어디든 좋으니까... 엄마랑 살래... 나 좀 데려가면 안 돼?
그녀의 어머니는 한 푼도 없이 집을 뛰쳐나간 이후로식당을 전전하며 숙식을 제공해 주는 곳에서 일을 하셨다고 했다. 식당 옆 조그마한 다락방에서 자고 일어나서 일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 곳에서 아이를 키울 수는 없었고, 2년 동안 일하며 모은 돈으로 방을 구해서 본인만의 살림을 다시 차렸다. 그리고 때마침 어린 딸이 데려가 달라는 말에 그녀의 어머니는 쪽지를 남기고는 딸을 데리고 자기가 마련한 집으로 갔다. 어머니가 쪽지에는 '내 딸 데려가니까 다시는 우리를 찾지 마'라고 적었다고 했다.
그렇게 그녀는 어머니와 둘이 살게 되었다. 조금 밝아진 그녀는 중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도 사귀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교 길에 교문 앞에 그녀의 아버지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냅다 도망쳤다. 그녀의 아버지가 다시 그녀를 데려갈까 두려웠다. 무사히 집에 온 그녀는 어머니께 이 사실을 알렸다. 그가 어떻게 내가 다니는 학교에 찾아온 것인지를 말이다. 어머니는 그동안 그녀의 아버지와도 연을 끊고 살아서 아무런 소식을 전달한 적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동사무소에서 자신의 자식임을 증명할 수 있으면 등본 상의 거주지와 학교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로도 그녀의 아버지가 집이든 학교든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떠한 해코지를 하러 온 것은 아니었고, 그저 그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만 하고 갔다고 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어떻게 그가 찾아온 것인지 알게 된 그녀는 주민등록 상 주소지를 친척의 집으로 변경하였고, 그다음부터는 그가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고 했다.
이후로 지금까지 그녀는 아버지 소식을 접한 적이 없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조차 없는 것이고, 알고 싶지도 않는 듯했다. 아버지 없이도 그녀는 긍정적으로 잘 자랐고, 어머니가 아버지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채우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심지어 대학 등록금도 어머니가 식당에서 일한 돈으로 모두 지원해 주었으니 말이다. 그 모습을 보며 자란 그녀는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모습을 계속 옆에서 지켜보았을 것이고, 그녀는 여자 혼자서도 오래도록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공무원이라는 꿈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꿈에 그리던 공무원 시험을 합격한 뒤 어머니와 함께 둘이서 부등 껴안고 울었다고 했다. 그렇게 몇 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던 그녀가 지금 내 앞에 있다. 슬픔과 비통함과 원망 가득한 울음을 터뜨리며, 내게 자신의 과거를 쏟아내고 있다. 난 비에 젖은 강아지 마냥 가만히 그녀 옆에 앉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