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힘든 과거를 살았던 건 매한가지였지만, 그녀의 상처는 내 것보다 훨씬 깊은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것일까? 그녀도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나에게 이따금 그녀의 아버지를 한 단어로 표현했었다. 정신질환자. 정신병이 있지 않고서야 자기 핏줄을 무책임하게 세상에 던져 놓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그녀의 전반적인 사정을 듣고 나니, 나 또한 그녀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모든 과거를 쏟아낸 뒤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던 나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친한 친구들에게도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내가 묵묵히 들어준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과거를 감내하기로 했다. 그녀 또한 내 과거를 감내했듯이 말이다. 지금의 그녀는 어엿한 공무원이고, 긍정적으로 자랐으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어두운 과거 따위는 내겐 그리 문제가 될 게 없었다.오히려 그녀의 어머니와 둘이서 소박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안심이 되었다. 다행이다. 그녀의 모든 운명의 수레바퀴가 결국 나에게로 향해 왔다는 것이. 나는 사랑의 감정에 더해 어떠한 책임감 같은 것이 솟구쳤다. 그녀를 꼭 행복하게 해 주고야 말겠다는 그런 책임감 말이다. 만나왔던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서로의 현재에서 만나 우리는 서로에게 반했고, 서로의 과거를 공유하면서 우린 서로를 감싸 안았다. 이제 해야 할 일은 함께 미래를 그리며, 행복한 나날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우리가 만나 나누는 얘기들은 이제 과거를 넘어 미래로 향해 있었다. 만난 지 1년이 가까워지는 시점에 우린 '함께 살게 되면...'이라는 말이 항상 덧붙여 나왔다.
"함께 살게 되면, 내가 맛있는 안주 만들어줄게."
"함께 살게 되면, 영화랑 드라마 밤새도록 보자!"
"함께 살게 되면, 아침에 깨워줄게."
"함께 살게 되면, 우리 아껴서 돈 열심히 모으자."
"함께 살게 되면..."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 1주년 기념으로 바르셀로나 가자."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 없다가, 확신의 찬 눈빛으로 내 눈을 보며 말했다.
"그래, 그러자!"
그녀는 언젠가 내게 지나가는 말로 얘기했었다.
"오빠, 그거 알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가면 100년 넘게 짓고 있는 성당이 있대. 내가 좋아하는 건축가 중에 가우디라고 있거든? 천재 건축가인데, 그 사람이 설계한 성당이야. 2026년에 완공된다고 하던데... 지금도 해질 무렵에 노을이 드리우면, 엄청 아름답게 보인대. 내 로망이 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에서 프러포즈받는 거였거든."
그때는 그냥 '오! 그런 곳이 있어?' 하고 넘어갔지만, 그녀와 결혼을 확신할수록 그녀의 말을 더욱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결국 1주년 계획 겸 프러포즈 계획으로 이를 실천에 옮기고자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녀도 나의 제안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인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한동안 바르셀로나 여행 계획을 짜느라 분주했다.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나름대로 다양한 관광 코스들을 짜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가는 것은 물론이고 가우디 투어와 여러 맛집들, 해변가 등을 두루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나는 그녀 몰래 미리 프러포즈 반지와 편지도 준비했다. 하지만 나의 엉성하고 허접한 프러포즈 계획은 점차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현실은 로망대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때는 몰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