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브로츠와프 눈길 산책

by 미 지


눈이 내리는 아침을 맞았다. 아침 일찍부터 소낙눈이 내려서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설레었는데 내일모레까지 눈이 올 거라고 일기예보에 떠 있다.

일요일 아침이라서 평소보다 더 늦은 아침을 먹고 '한적한 공원과 회전목마가 있는 정원'이라고 구글맵에 나와있는 코페르니쿠스 공원으로 향했다.

'한적한 공원'을 고유명사처럼 쓰고 있는 공원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는데, 지도를 보고 찾아간 곳은 바로 첫날 산책 때 지나갔던 곳이었다. 희극극장 옆, 정말로 한적한 공원에 회전목마도 운행 안 한 지 오래된 모습으로 닫혀있었다.


가끔 색색깔의 비둘기들이 통통하게 무리를 지어 누군가 뿌려준 먹이를 먹고 있는 거리를 지나기도 하면서 눈 오는 거리를 걸었다. 유럽의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지은 잘못을 속죄하는 의미로 비둘기에게 먹이를 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갈 곳 없고 먹을 것 없는 길짐승들을 위해 아무렇게나 뿌려진 먹이이지만 눈 오는 거리에서는 조금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풍경이기도 했다.

올드타운을 지나서 걷다 보면 브로츠와프 대학이 나온다. 크라쿠프 거리에 흔하게 보이던 베이글빵 (오빠자넥)을 파는 카트는 이곳에는 없다.

퐁첵 가게가 보여서 반가운 마음에 라즈베리 도넛을 샀다.


유튜브와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의미 있는 거리와 건축물을 찾아 걷다 보면 가끔 걷기 투어를 하는 여행객 무리를 만나기도 한다. 가이드에게 설명을 듣고 있는 젊은 학생들. 어떤 모양으로든 대학가의 작은 골목 이곳저곳에서 보이는 생기 있는 풍경들이 그저 예쁘고 그저 반갑다.



오래전 호주에서 학생의 문제행동 분석에 대한 연수를 받은 적이 있다. 한 교수님께서 강의 중에 'How often'을 발음하시면서 정확하게 '하우 옵/튼' 소리를 내셨다. 안 그래도 영어 강의 내용은 귀에 안 들어오고 작은 흥밋거리 하나라도 생기면 다들 거기에 정신을 팔면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기에 우리 서른 명은 나지막하게 '이야! 발음, 정확하네!' 하며 신기해하는 수다를 떨었었다. 우리가 의레껏 묵음으로 배워 온 't'를 그렇게 정확하게 발음하는 원어민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저 세상의 영어는 꼭 우리가 배운 것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까르푸에서 물건을 사고 계산을 할 때 캐셔는 은빛 머리카락을 가볍게 묶은, 웹툰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맑은 얼굴에 단정한 옷차림이 인상적인 젊은 남자였다. 물건 바코드 스캔이 끝나고 '쇼핑백이 필요한가' 물었을 그의 말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한 상태로 카드를 내밀었다. 물건이 몇 개 안 되니까 굳이 쇼핑백은 필요 없을 것이라고 눈치챘을 그가 내 손에 든 카드를 보며 얼른 다음 단계의 단어를 말했다.

'까르~드'.

아, 난 잠시 당황했다. Card의 r발음을 이렇게 정교하게 발음할 수 있는 거였구나. 짧고 재빠르게 스쳐가는 그의 '르~' 발음 속에는 아마도 그 '르'소리가 세 개 정도는 순식간에 겹쳐져 들어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정교한 소리였다. 조금 당황했지만 얼른 귀에 새겼다.


어떤 영향으로 같은 어원에서 출발한 언어들이 다른 형태로 자리 잡아가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낯설게 느낀 것은 전적으로 나의 경험부족에서 온 것이니까.


좋은 여행의 기록은 이미 유튜브에 넘쳐난다. 폴란드 여행 마스터를 획득하는 일이 이 여행의 목표가 아니니까, 이런 미성숙한 상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해도 상관이 없는 나는 그저 겸손한 자세로 여행자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솔직하게 미성숙한 상태를 인정하며 힘이 닿는 한도 안에서 이 미성숙함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해 보기로 다시 마음먹는다.




나이 들어 삶의 방식이 더 확고해지고 자기 견해가 옳다는 확신도 커지면 새로운 일에 흥미도 덜 느끼고 더욱 완고해진다.

노년은 대부분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미성숙함을 드러내는 치명적인 마지막 단계이다. 실제로 노인이 되면 눈물도 많고 요구도 많아지며 교활하고 자기중심적이 된다. 이것은 두 번째 아동기에 들어섰기 때문이 아니라 첫 번째 아동기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인기의 겉치레가 다 닳아 없어진 것뿐이다.


언니에게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병원에 계신 엄마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세계도 점점 고집스럽게 작아져가고 있다. 드라이브를 할 때도 복잡해지고 달라진 거리 이름이 아버지가 한창때 달리던 그 거리가 맞느냐 여러 번 확인을 하시며 물으시곤 하신다. 많이 놀라고 당황하신 눈빛을 감추지 않으시면서.

아버지가 점점 당신 세계의 문을 닫는 시간은 천천히 오래오래 걸리고 있는데 아버지 영역 밖으로 온통 열려있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이 빠르게 달려가며 모습을 바꾸고 있다. 그래서 짧은 토요일의 드라이브와 식사를 마친 후에 아버지는 많이 피곤해하신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 세계의 문을 아주 조금 밀어서 닫으시면서 어제 받은 충격을 어제의 기억 조금을 섞어서 지우곤 하신다.


아마 그렇게 나도 앞으로 오랜 시간이 걸려 내 세계의 문을 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가장 성숙한 사람이야말로 정신적으로 가장 젊은 사람이라는 스캇펙 박사의 권유를 잊지 않기를. 그리하여 최대한 덜 고집스럽고 덜 교활하고 덜 자기중심적이길 위해서 늘 열려있는 사람이 되어주기를 걸음마다 새기며 눈 내리는 3월 낯선 땅에서 긴 산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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