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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Sep 02. 2020

돈가스랑 맥주

결혼 전 낙성대역 근처에서 자취를 한 적이 있다. 버거킹이 2개나 있는 더블 버세권이었다. 방 크기는 취준 기간에 잠깐 살았던 고시원만큼이나 작았지만 수납공간이 무진장 많아서 불편함은 없었다.


우리집에서 길만 하나 건너면 바로 시장이 나왔다. 택시기사님께 "인헌시장 건너편으로 가주세요." 라고 하면 못 알아들으실 정도로 작은 시장이었다. 퇴근길에 그곳에 들 오늘 저녁엔 뭘 먹어볼까 행복한 고민에 빠지곤 했다. 조리가 필요 없는 아이들을 찾다 보면 메뉴 자연스레 좁혀졌다. 가장 많이 간택 음식은 바로 돈가스였다.


시장 입구에 팔뚝이 내 허벅지만 한 형님이 돈가스를 튀기고 있었는데 난 매번 더 맛있는 걸 찾아보겠다며 그곳을 지나쳤다. 그러나 반대쪽 입구를 찍고 다시 돌아온 최종선택은 어김없이 그 돈가스집이었다.


'치즈돈가스 두장+등심돈가스 두장에 만원' 이런 식으로 팔았는데, 혼자 다 먹을 자신이 없어서 약간 손해 보는 기분을 감수하고 등심돈가스 두장에 치즈스틱 하나를 시켰더랬다. 돈가스가 튀겨지는 시간은 뭐랄까, 진짜 너무 더워서 방에 처박혀 부채질만 하고 있던 초등학교 여름방학 어느 날 엄마가 "롯데리아 팥빙수 먹으러 갈까?"라며 구원과도 같은 손을 내밀 때 느꼈던 설렘으로 가득했다.


노릇노릇해진 돈가스를 비닐봉지에 고이 담아 나의 작은 자취방으로 돌아가던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만원에 네 캔 짜리 수입맥주를 사들고 집에 들어온 다음, 곧장 노트북을 켰다. 언젠가 보려고 다운받아놨던 영화들을 고르다 보면, 왠지 새로운 영화를 보기가 싫어져 "비포선셋"이나 "서유기" 같은 영화를 틀곤 했다. 스무 번도 넘게 봤던 그 영화들과 함께 돈가스를 안주 삼아 맥주를 홀짝이던 시간은 가장 확실한 힐링이었다.


맥주 캔들은 자취방 책상 구석에 하나 둘 쌓아놨다. 높이 쌓여갈수록 내 눈엔 그럴듯한 컬렉션처럼 보였다. 그 아이들을 언제 어떤 음식과 어떤 영화를 보며 마셨는지는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뻔했다.

안 그래도 좁던 내 방은 점점 더 좁아졌지만,

내 시간과 취향이 깃든 무언가가 조금씩 쌓이는 느낌 제법 좋았다.




오늘 재택근무가 끝나고 잠깐 산책을 나갔다가, 쏟아지는 빗속에 아스라이 그때 먹었던 돈가스집이 보였다. 하늘에 구멍이 뚫려서 타임리프 같은 게 된 건가 싶어 다가갔는데, 수요일마다 아파트 단지에 열리는 장에 같은 브랜드의 가게가 들어왔다고 한다. 물론 낙성대 그 시장에 있던 팔뚝 굵은 형님은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큰 맘먹고 치즈돈가스 두장 + 등심돈가스 두장을 세트로 주문했다. 통근버스도 안 탔으면서 통근버스 진담집을 쓰고 있는 지금, 등심돈가스는 한 장 남았는데 이미 배가 터질 지경이다. 어떻게든 다 먹겠다는 각오로 맥주 대신 백세주로 반주를 하는데도 이 모양이다.


일기는 일기장에라는 소릴 들어 마땅한 이 글을 쓴 이유는 단순하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도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 오늘 운명처럼 돈가스와 재회하기 전까지 난 내가 얼마나 돈가스를 좋아하는지, 돈가스와 반주를 하는 시간이 얼마나 큰 힐링인지 잊고 있었다. 힐링거리 하나를 놓치면 인생에 막대한 손해다. 기억하고 지켜야 한다.


저녁을 먹고 들어온다고 한 아내가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더 행복한 2차 반주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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