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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리 Aug 24. 2024

06 나다운 글

글쓰기를 배우는 시간(6)

   글쓰기 클래스를 다니는 동안 친구에게 계속 내 숙제글을 보여주곤 했다. 어제 만났을 때도 ‘독후감 아닌 독후감’과 ‘독자의 발견’을 보여주었다. 친구가 말했다.

   “난 글쓰기 클래스 교수님 의견과 달라.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독후감 쓸 때, 일부러 관련 글 안 찾아봤어. 나중에는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냐.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균형 잡힌 글을 쓰면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좋은  글이 될 수는 있겠지만 나다움은 사라져 버리지 않나? 다른 글을 찾아보기 전에 내 관점을 충분히 잡아가는 것이 먼저인 것 같아.”


   맞는 말이다. 친구의 말을 들으니 내가 독후감 쓰기에 관한 교수의 수업 내용을 잘못 해석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대상 텍스트를 충분히 읽음→ 관련 자료를 충분히 찾아봄→ 내 글만의 차별점을 세워 글을 씀

   아래와 같이 수정해야 맞겠다. 프로 작가인 교수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해서 넣지 않았겠지. 내게는 꼭 필요하고 중요한 말. ‘나의 관점을 세움’                    


(1) 대상 텍스트를 충분히 읽으며 나의 관점을 세움 → (2) 관련 자료를 필요한 만큼 찾아봄 → (3) 내 글만의 차별점이 잘 드러나게 글쓰기            

  나는 (1)의 과정이 충분히 익지도 않았는데 (2)로 넘어가서 세상의 좋은 글들에 압도당해버렸나 보다. 친구의 말처럼 ‘나다움’을 먼저 찾아야지. 그러려면 일단은 뭔가 그럴싸하게 틀을 갖춘 글을 만들겠다는 욕심을 내려놓아야겠다. 엉성해도 ‘내 글’을 만들어야겠다. 독후감을 다시 쓴다.                     


나의 글쓰기를 묻다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고

     이 책에는 여러 양상의 글쓰기가 등장한다. 작가가 여러 번 꼬아놓은 플롯 속에서 글쓰기를 하고 있는 인물들을 떠올려 본다.

1. 할머니 집에 살던 쌍둥이들의 글쓰기
    할머니집에 맡겨질 때 큰 사전을 챙겨 왔던 쌍둥이는 모두 먹을 것에 욕심내는 전쟁상황에서도 종이와 연필과 읽을거리를 구하려 애쓴다. 그리고 작문 연습을 한다. 서로가 준 글감으로 2장 정도의 분량을 채우는 방법으로. 감정과 평가를 담아서는 안 되고 사실만 묘사하는 문체를 사용해서.

2. 빅토르의 글쓰기
    젊은 시절 작가가 되는 꿈을 꾸었던 서점 주인 빅토르는 누나를 죽이고서야 자신의 글을 쓴다.  누나는 잊고 있던 작가의 꿈을 상기시켜 주고 술과 담배를 끊을 수 있도록 돕고 집안일을 도맡아주며 글을 쓰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빅토르는 다른 책의 문장을 베껴 놓기만 할 뿐 자신의 글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20년 동안 혼자 살면서도 써지지 않던 글이, 누나가 살림을 도맡아 해 줄 때도 써지지 않던 글이 누나의 시신 옆에서 써진다. 그 한 편의 글을 남기고 빅토르는 사형당한다.

3. 마티아스의 글쓰기
    세상에 살았던 일곱 해 동안 고통스러운 일이 더 많았던  마티아스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노트에 뭐든지 다 써둔다.  그는 자살하기 전에 자신이 썼던 글부터 태운다. 그런데  ‘마티아스의 노트’라고 적힌 노트 표지는 태우지 않고 자신의 베개 위에 놓아둔 후에 죽는다. 이 세상 누구도 마티아스의 글을 읽을 수 없다.  

4. 루카스의 글쓰기
    외롭고 슬픈 삶을 살았던  루카스는 ‘있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얘기를(471쪽)’썼다.   글 속에서 많은 인물을 만들어냈지만 압권은 쌍둥이 형제이다. 어느 때는 자신의 글이 ‘순거짓’(561쪽)이라고 말하지만 또 어떤 때에는 그는 ‘문학과 현실을 혼동하고 있다(546쪽)’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자신이 글 속에서 만들어 낸 그 형제, 클라우스와 동행하며 살았다.  

5. 클라우스의 글쓰기
    그는 주로 밤에 글을 쓴다. 대부분의 낮시간은 노모를 돌봐야 한다. 하지만 노모는 생사를 모르는 루카스를 기다리며 사느라 클라우스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매일 밤 루카스의 처지가 훨씬 낫고 자신의 삶은 너무 무겁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만들어낸 루카스의 삶에 관한 글은 비참한 면 이면에 따뜻한 면도 있다. 그리고 끝내 루카스가 죽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고 노모가 죽고 난 후에는 루카스가 죽은 방식으로 자신도 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6. 작가의 글쓰기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전쟁 중인 고국 헝가리를 떠나 국경을 넘을 때 짐가방 속에 사전을 챙겼던 사람이다. 28살에 프랑스어로 읽고 쓰는 법을 처음 배웠고 모국어가 아닌 그 낯선 언어로 작품활동을 했다. 그녀는 작품 속 인물들의 마음속에 절대 들어가지 않고 외부에서 바라보는 식으로 글을 쓴다. 그녀에게 글쓰기는 행복을 주는 행위라기보다는 하나의 뿌리 깊은 습관이자 관성이다.

7. 나의 글쓰기
  글을 쓰지 않으면 삶이 지루하다는 점에서 작가가 글 쓰는 이유랑 내가 글 쓰는 이유는 비슷하다. 글쓰기가 나를 구원한다거나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기대는 없다. 내가 그냥 쓰는 사람이라 쓴다. 하지만 지금 나의 글쓰기는 마티아스의 글쓰기와 가장 닮아 있다.  나의 희로애락을 글에 담지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글이 독자에게 건네는 행위를 하지 않고 폐기되기 때문이다. 나는 썼어!라는 자의식만 표지처럼 남았으나 그게 무슨 소용이람. 마티아스가 자신의 죽음을 확신했기 때문에 했던 행동을 나는 왜 하고 있을까.  
  이런 상태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요즘엔 88세의 나(이하 ‘팔팔할망’으로 칭함.)를 독자로 상정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 나에게 가장 문제적 인물은 빅토르이다. 그는 글쓰기에 관한 여러 가지 가설을 떠올려 보게 한다. 빅토르에게 누나란 어떤 의미였을까. 어린 시절 누나와 공유하던 비밀스러운 죄책감과 상처이지 않았을까. 누나를 죽이고서야 글을 쓸 수 있었다면 누나랑 같이 살지 않던 세월은 왜 글을 못 썼을까. 빅토르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누나를 만나야 했고 누나랑 싸워야 했고 누나를 죽여야 했다. 그래서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깊은 내면에 ‘누나’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그것을 응시하는 일은 싸우고 목 졸라 죽였다,라고 해야 할 만큼 힘든 일이면서 동시에 ‘사정’(417쪽)의 순간으로 표현해야 할 만큼 해방감도 느껴지는 일일까. 빅토르가 그 후에야 드디어 써낸 자신의 이야기는 ‘잘 읽히고 재미있는 글(402쪽)’이 되었다.  
   문제는 사형이 결정되어 빅토르가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을 탐색하는 일이 가까운 주위 사람들과 뗄 수 없을 정도로 연결되어 있어서 주위 사람들이 내 글 속에서 사회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정도의 글이 써지는 상황에 빗대어 본다. 이 책대로라면 흥미 있게 읽는 이가 있더라도 사회는 그 작가에게 더 이상 글을 쓰지 마시오!라고 사형 선고를 내린다. 내 글을 쓰면서도 계속해서 글을 쓰려면 그 경계선을 절묘하게 줄타기해야 한다. 자기 발견은 너무나 강력한 그 무엇과도 같아서 글이 써지게도 하지만, 다음 글을 쓸 수 없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빅토르의 이야기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자신을 깊숙하게 직면해야 글이 써질 것이오. 그러나 그것도 정도껏 해야 글 쓰는 사람으로 오랫동안 살아갈 수 있을 것이오.’
   클라우스의 글쓰기가 클라우스의 삶을 바꿔주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부럽다. 클라우스는 루카스를 만났기 때문이다. 내가 죽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죽이지도 않게 줄타기를 잘하며 글을 계속 쓰다 보면 결국은 루카스와 클라우스 같은 작업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본다. 한 사내가 자신의 쌍둥이 형제에 대해 이 정도의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실존하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내게 루카스와 클라우스와 같은 작업이란 한 인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람인지 비인간인지도 모르겠고 성별조차도 모를 이가 내 안에 존재한다. 내 마음속 깊숙이 오랫동안 살고 있지만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립다’라는 표현이 되려 어울리는 정념 같은 이. 그를 써내야만 그를 만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쌍둥이’라는 설정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나도 내 속에 살고 있는 그 이가 평행 우주에 살고 있는 또 다른 나인 건 아닐까,라는 상상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나도 내 속에 깊이 사는 이를 만나려면 우선은 쌍둥이 형제처럼 글쓰기를 계속 연습해야 하겠지. 그리고 쓴 글은 태우지 않고 계속 상대방에게 보여야 한다. ‘잘못했음(43쪽)’을 받은 작문은 다시 쓰면 되니까. 자, 글을 쓰자.


  일반적인 독후감 같지도 않고 균형 잡혀 있지도 않지만, 일단 내 관점이 담겼다는 것으로 흡족하다. 나다운 글은 현재의 나를 만족시킨다.  팔팔할망은 만족하시는지?




from 51세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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