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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정 Oct 23. 2024

여름휴가_08

크게 한번 내치려는 엄마의 독설은 판이 바뀌자 자연스럽게 무마된다.

크게 한번 내치려는 엄마의 독설은 판이 바뀌자 자연스럽게 무마된다. 이번 멤버는 엄마와 나, 시아버지다.

- 대박! 저, 짝 맞는 거 엄청납니다. 속도감 있게 진행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나는 말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으려 화투를 채근한다. 그때까지 잠잠하던 남편이 말한다.

- 아, 아까 어머님이 물으셨죠?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대답이 늦었는데, 저는 문인화를 배워 볼 생각입니다. 

이건 또 뭔 말인가? 나는 순간 엄마를 쳐다본다. 엄마 얼굴은 벌레 씹은 얼굴 그 자체다. 그런데 남편은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긴 한 걸까? 문인화를 배우겠다니? 정말 배워 볼 생각인 걸까? 엄마는 뒷전, 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남편의 말이 이어진다. 

- 그런 말 있잖아요. 가족이 행복하려면 개인이 먼저 행복해야 한다고. 그래서 저는 문인화를 배워 행복해질 생각입니다.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요. 제 삶에 만족한 만큼 사랑을 듬뿍 나눠줄 테니까요.

코끝이 시큰, 가슴이 콩콩 뛴다. 엄마의 관점으로 보면 욕심도 야망도 없는 듯 보이는 남편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사는 게 아닌가. 그건 내 선택에 대한 뿌듯함이고 자부심이다. 내가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건,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집단에서 떨어져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하고, 정해진 룰을 따르지 않으려면 내가 만들며 살아야 한다. 그게 귀찮아서 남들 앞에 다름을 드러내는 걸 주저하게 되는 게 보통의 사람들이다.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갖고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으려면 적극적이고 당당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도피처럼 보이는 남편의 행동은 자신이 지향하는 다른 어느 쪽에 안착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남편은 엄마가 걱정하는 나약하고 못난 사람이 아니다. 엄마만 그 사실을 모른다.

- 와, 오빠 짱 멋있다! 자, 그런 의미로 언니는 피박!

남편을 응원하는 시아버지의 말에 나도 모르게 간질간질 웃음이 삐져나온다. 은근하게 나를 흘긴 엄마가 정색을 한다. 

- 내가 자네 행복론 듣쟀어? 진이랑 휘, 어떻게 건사할 거냐고 물었잖아?

- 어머, 저 오빠, 대답 제대로 한 거 같은데요? 어쨌든 이 오빠 튜 샷 들어갑니다. 다들 대피 하셩!

튜, 에 악센트를 주는 시아버지의 표정이 짓궂다. 반면 엄마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다. 폼 나게 밥 한 끼 사겠다며 챙겨온 현금을 몽땅 잃은 엄마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술기운을 빌어 평소 못마땅한 사위를 닦달해 딸의 존재를 상승시키려던 욕심을 이루지 못한 엄마의 얼굴이 파리하다. 이상한 건 엄마의 모습에 반응하는 나다. 이제까지 나란하던 질서가 뒤죽박죽 흐트러진다. 마치 새롭게 피돌기가 시작된 듯 어질어질 속이 울렁거린다. 울컥, 가슴이 뜨거워지더니 연민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내 안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분노도 억울함도 다 사라진다. 오직 본능만이 남는다. 엄마를 지키겠다는, 영원한 엄마 편이 되어야겠다는 본능.

엄마의 입가에 묻은 맥주 거품을 닦는다. 내 손길에도 엄마는 심드렁하다. 술기운에 자신을 놓아버린 건가. 아니면 상처가 너무 커 균형감각을 잃은 건가. 캔의 마지막 한 모금까지 탈탈 털어 마신 엄마가 자신의 사고에 닿지 않는 세상을 등지듯 옆으로 스르르 넘어진다.

- 차암 내…… 이러얼 주울 아라 써. 한 치…… 아앞…… 도 모르는 게 인새앵……이라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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