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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의 노예를 건드리셨습니다

by 쁘띠

신혼생활 3년을 지나 4년 차 되던 해의 나는 퇴사를 하고 서울촌놈을 따라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남편은 굉장히 바쁜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고작 월요일 하루 쉰다. 주말에도 언제나 일을 하는 사람이고 유일하게 쉬는 월요일도 보장되지는 않는다. 나는 퇴사를 한 것이 내심 싫었지만 잠깐 쉬어가자 라는 생각이 들어 한편으로는 또 좋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중한 생명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나와 그는 아이를 기다리고 있던 찰나에 잘 와주었다고 생각했다. 시댁에선 서울촌놈이 유일하게 결혼 한 사람이었고 또 유일한 아기가 태어나게 되는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을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래도 기쁘고 또 기뻤다.


시어머님은 아이들을 좋아하시는 분이시고, 시아버님도 손주이니 굉장히 예뻐하실 거라 생각했다.

시누이는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항상 말은 하는데 사실 나는 말 뿐이라고 생각했다. 첫 조카이니 얼마나 예뻐할지 예상이 갔고 내가 아는 시누이의 성격이라면 분명 애정하는 거 그 이상일 거라 예상했다.


출산 전, 시어머님의 전화 한 통이 있었다.

한국은 출산을 하면 양가 부모님들이 조금씩 마음을 담아 돈을 주시는 풍습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어머님께서 돈이 없었는데 어떻게 생겨났다고 하시면서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200만 원을 주셨다. 나는 사실 안 받아도 괜찮았지만 어머님도 꽁돈이 생기신 거라 해서 감사히 잘 받았다. 엄마도 200만 원을 주셔서 그렇게 나는 조리원을 갈 수 있었고 출산하고 아기 용품 사는데 넉넉히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진심으로 두 분께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출산 후 시어머님은 미역국을 끓여 보내주셨고 , 아이에 대한 사랑과 따스함을 많이 보여주셨다. 그리고 넘치는 관심 또한 보내주셨다.

임신 시절엔 말 한마디 안 하시더니, 이제 태어나니 본격적으로 이런저런 말들이 내게 오기 시작했다.


나는 몸조리를 위해 조리원에서 생활을 하는데 , 어느 날 시어머님과 시이모의 카톡이 내게 왔다. 아기 사진 좀 올려달라는 요청이었다.

아기 사진을 양가 가족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사진 어플에 초대를 했는데 , 나는 시간이 되고 내 몸이 괜찮을 때마다 사진을 올렸다. 그런데 매일 올리는 건 쉽지가 않았다. 일단 호르몬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더욱 예민하고 까칠한 공주님이었다. 그런데 그런 산모에게 사진 요청이라니. 곧바로 캡처해서 남편에게 보냈다. 남편도 이건 아니라며 시이모와 통화를 했나 보다. 시이모는 곧장 남편에게 생각이 짧았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하셨다. 그리고 나는 시어머니에게 직접 답장을 보냈다.

“매일 올리는 건 어려워요. 올릴 수 있을 때마다 올려드릴게요” 답이 왔다. “그래 알겠다~”


출산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조리원에 있다고 해서 다 편하게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서울촌놈이 조리원에 함께 있지 않았고, 혼자서 2주라는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출산을 하고도 당일만 남편이 함께했고 곧장 출근을 해야 했던 사람이다. 병원에서도 나는 모든 걸 혼자 해냈다. 그래서 더욱 서러움과 우울 여러 가지 짬뽕된 감정들을 가지고 있었다. 또 당시에 여전히 코로나 시대였고 함부로 외부인들이 올 수도 없던 상황이어서 더욱 나는 혼자 회복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기분 나빠 정말.

속으로 외치고 남편에게 그 모든 화살이 갔다. 하루는 시아버님이 연락 오셔서 , 모유를 먹여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저 웃어넘겼다. 모유가 내 마음처럼 되나요? 그리고 그건 어디까지나 엄마의 선택이지, 왜 항상 어른들이 그렇게 간섭을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나는 정말로 그런 말들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옛날 우리 엄마 시대는 도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시대가 바뀌었다. 그렇다면 우리 엄마든 누구든 나 또한 마찬가지이고, 예전 것만 고집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 싶다. 물론 어른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생각했다. 역시나, 손주가 태어나니 안 보이던 며느리는 더 안 보이나 보네요. 아, 아니다 이제 나는 그냥 손주의 엄마일 뿐이구나 싶었다.

아이가 60일쯤 되던 추운 겨울날, 나는 아이를 보여드리려고 시댁에 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시어머님 왈, “줘. 이리 줘”

뭘 줘요? 아기가 물건인가 아니 그걸 떠나서 몸도 다 회복이 안된 사람이 갔는데 내게 건넨 인사는 없으셨다. 시어머님은 그렇게 후다닥 아기를 안고 시할머니 품으로 안겨드렸다. 내가 뭐 못하게라도 할까 봐 그러셨던 걸까? 그리고 왜 그렇게 멋대로 하신 걸까? 싶은 생각이 확 밀려왔다. 그냥 그 한 마디에 화가 났다. 하지만 늘 그랬듯 꾹 누르고 참았다. 100일 반지를 미리 전해주셨지만 반갑지 않았다. 이미 마음이 무너져 있던 상태였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시누이와 돈을 보태 반지를 해주시고 , 인증샷을 찍어 보여줘야 한다며 시어머님은 사진을 몇 장 찍으셨고 아이 옷을 너무 춥게 입힌 거 아니냐며 또 한 말씀하셨다. 내 새끼는 열이 많은 아기다. 특히나 요즘 아기들은 태어나 집에 오면 집 온도를 겨울이어도 21~23도까지로 설정해 놓는다. 그래서 언제나 수면잠옷이 필수이다. 나는 너무 춥지만 아기는 열이 많고 온도에 민감하기에 더욱 엄마들은 체크를 잘하며 아이 옷도 입힌다. 그런데 이러쿵저러쿵 , 왜 그런 말을 하시는지 나는 시어머님이 아니니까, 이해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고모라는 사람은 조카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내 예상은 역시나 틀리지 않았다. 시댁 식구들 모두 아이와 사랑에 빠졌다.

아이를 예뻐해 주는 것,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그 이상은 원치 않는다.

시누이는 내가 임신을 했을 때도 출산을 했을 때도 먼저 연락 한 통 하지 않았다. 축하한다 고생했다 그 말이 어려웠던 걸까? 아니면 먼저 연락하는 게 자존심이 상했던 걸까? 아니면 정말로 무관심했던 걸까? 어떠했든지 간에 나는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출산 당시에도 나는 사진을 찍어 시누이에게 ‘조카입니다’라고 먼저 연락을 보냈었다. 하물며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축하 인사를 건네는데 자신의 동생의 아기를 가진 사람에게 먼저 연락을 안 했다는 것이 나로서는 참 별로라고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인사를 안 하는 것이 집안 내력인가? (시어머님은 우리 엄마를 봐도 절대 먼저 인사를 하지 않으신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내 사랑, 내 조카 내 힐링 이러는 꼴이 나는 우스웠고 정말로 더 아주 단단히, 시누이란 사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남편이란 인간도 나와 생각이 동일한 부분이 더 많다. 하지만 그 당시엔 늘 자신의 엄마는 삶의 낙이 손주뿐이고 어른들은 원래 다 그렇다며 내게 말했다.

자신의 누나는 그냥 무시하고 신경도 주지 말라고 할 뿐이었다. 본인은 가족이니까 그게 가능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들에게 가족인 걸까? 가족이라고 생각을 하든 남이라고 여기든 사람은 언제나 예의를 지키는 게 맞다고 생각된다. 선을 지키고 기본적인 태도를 잘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는 걸까 싶은 생각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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