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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과 고독, 희망과 절망의 교차료 1980년대

by Siesta


어머니가 하얀 목련화 봉우리보다 더 창백한 뼈 마른 얼굴로 우리 네 자매를 보시며


" 해지기 전에 꼭 집으로 돌아와, 아니면 엄마 대문 앞에서 너희들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렇게 말씀하시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리고 앙상한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으로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시며


" 우리 똑똑한 윤신이 엄마 말 잘 알아듣지? 세상이 너무 험하잖아... 항상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조심하고..."


아버지의 공상 시리즈가 쏟아져 나오던 1980년대...


보수적이고 몸이 약하신 어머니는 겨우 이불에서 몸을 일으키시는 날이 많았다.


큰언니가 씩씩하게 우리의 어머니가 돼서 등교 준비를 도와주던 날들이 더 많았던 우리의 어린 시절...


딸만 넷이었던 우리 집은 항상 웃음과 울음이 교차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이화여대 음대를 나와서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으로 계속 일하시다가 몸이 너무 약해서 집에서 동내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시던 나의 어머니는 이 시절에 항상 뉴스를 보시면서 한숨을 쉬시던 것이 생각난다.


네 자매 중에 모델같이 예쁘게 태어난 막내는 중학교 때 벌써 키가 165가 넘었지만 항상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서


"엄마, 나 모델 해도 되겠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그렇게 항상 어리광을 피웠던 것도 생각난다.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나온 둘째 언니가 이때 대학 캠퍼스에서 주워온 "고문 경찰의 진실" 등에 대한 삐라지를 주워오면 어머니가


" 이런 거 절대로 집으로 가지고 오면 안 돼... 읽어 보지도 말고 버려"


그렇게 놀라서 소리 지르시던 것도 생각난다.


힘들고 삭막했던 서울...


하지만 대한민국의 지성인들을 부모로 만난 우리 네 자매의 삶은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삶이었다.


그것도 두 예술인의 부모 밑에서 1970년대 1980년대를 지낸 우리 네 자매의 삶은 많은 서울의 힘들고 잔인했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로 가기 위한 예술인들의 광란과 고독 그리고 희망의 교차로에서 만들어 나간 삶이었다.


우리 네 자매가 지구상의 세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는 것은 이 교차로의 혼란 속에서 각기 찾아낸 탈출로였던 것 같다.


나는 스페인 사람이 되었고 나의 동생은 미국 사람이 되었고 엄마 같은 큰언니는 대한민국을 지키며 항상 우리를 따듯하게 맞아주는 집이 되었다.


가장 씩씩하고 진취적이고 용감했던 둘째 언니는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모두 다시 만날 날을 준비하고 있다.


적어도 대한민국 안에서 우리 네 자매들을 키우시며 보석보다 더 아름다운 추상을 대한민국에 남기신 나의 부모님과 우리의 삶을 글로 남기는 것이 나의 의무라는 꿈을 꾸었다.


꿈과 현실의 중간상태를 사셨던 나의 부모님들이 만들어낸 우리의 삶...


유토피아를 찾아 평생 방황하셨던 나의 아버지 조영동 화백...


그리고 그 방황 자체가 유토피아였던 우리 어머니...


조금씩 떠오르는 우리의 아름답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이 아버지의 공상 시리즈로 나의 온몸의 세포로 하나하나씩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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