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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기 책상에서 서울대 책상으로

by Sie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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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Soo의 얼굴이 핌 범벅이 되었다.


어디가 어떻게 돼서 어디서 피가 나오는지 알 수도 없게 피 범벅이 되었다.


큰언니가 갓난쟁이 Soo 를 안고는 소리 질렀다.


" Hyon, 얼른 물수건 가지고 오고 윤신이 너는 빨리 뛰어가서 엄마 불러와"


나는 너무 급한 나머지 엄마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미국에서 온 목사님 댁'으로 가려면 층계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리고 도로를 두 번 건너고 아렛막 길로 꼬부러져서 세 번째 큰 대문 집으로 가야 한다.


어머니는 이 미국에서 온 목사님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시는 일을 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저녁을 차려 주시고는 큰언니에게 갓난쟁이 Soo 를 맡기고 나가셨다.


큰언니는 사실 엄마보다 훨씬 아기들을 잘 보지만 ( 큰언니는 이후에 유아 교육학과를 나와서 어린이집을 운영했다) 그날 앉은뱅이책상의 모서리에 아기의 머리가 정통으로 부딪칠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워낙 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던 아기인 내 동생 수현이가 그날 그렇게 빨리 기어서 앉은뱅이책상까지 기어갈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길가에 버려져 있던 낮은 나무 책상이 우리 막내의 이마를 찢어놓는 무서운 흉기로 변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둘째 언니 Hyon 언니가 이 책상을 길에서 주워오면서


"이제는 나도 책상이 생겼다. 누워서 숙제하던 시간은 지났다"


고 선언하며 기뻐할 때는 이 책상이 이런 흉기로 변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나는 너무 급한 나머지 신발 한 짝은 마당 어딘가에서 잃어버려도 엄마를 부르러 층계를 내려가 올라가 오르막길 내리막길을 건너 건너 큰 대문들이 있는 "부자 동내"에 도착했다.


대문을 온 힘을 다해 주먹으로 두드리며 엄마를 불렀다.


" 엄마, 엄마, Soo 눈깔이 빠졌어. Soo 얼굴이 피가 진창이야. 엄마 빨리 와"


커다란 대문이 열리고 큰언니보다도 더 어린 여자아이가 나왔다.


" 무슨 일이야?"


이 집에 식모로 일하던 14살 된 "춘자 씨"였다.


" 동생이 눈깔이 빠졌어요"


5살 겨우 된 내가 숨을 헐덕이며 말하자 춘자 씨도 얼굴이 창백해졌다.


" 피아노 선생님... 아기가 눈깔이 빠졌대요."


엄마가 급하게 집에서 뛰어나와 내 손을 잡고 집까지 달려왔다.


어두운 현관을 지나 전깃불이 있는 마루에 들어왔을 때 상황은 훨씬 더 좋아져 있었다.


아기의 얼굴엔 기저귀 천으로 만든 붕대가 감겨져 있었고 둘째 언니 지현 언니는 피 붙은 책상을 끌어내고 있었다.


큰언니가 차분하게 어머니에게 말했다.


"책상 모서리에 부딪쳤는데 이마가 찢어졌어요. 일단 비누로 소독하고 기저귀 천으로 눌러서 감아 놨어요."


아기 Soo가 큰언니의 목을 꽉 안고 있었다.


둘째 언니 Hyon 언니가 무거운 책상을 들고 울먹이고 있었다.


"내가 주워온 책상 때문이에요. 엄마, 잘못했어요"


엄마는 아기를 업고 김 소아과로 달렸다.


나도 뒤따라 달렸다.


Hyon 언니도 뒤따라 달렸다.


소아과 선생님이 수현이의 이마는 4바늘을 꿰매야 한다고 하셨다.


"여자아이인데 흉터가 많이 지진 않을까요?"


김 소아과 선생님이 대답하셨다.


"원래 얼굴엔 흉터가 좀 남기 때문에 조심해서 꿰매도 아마 흉터가 남을 겁니다."


역촌동으로 이사 오기 2년 전 내가 5살, Soo가 1살 때 일어난 사건이다.


김 소아과 선생님 말씀대로 내 동생의 이마의 상처는 아직도 남아있다.


내 동생 Soo는 고현정보다 더 예쁘고 키가 크다.


어떻게 우리 집안에서 이렇게 절세미인이 나왔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모두 커서 성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수현이는 "돌연변이" " 주워온 아이" " 엄마의 외도" 이렇게 세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고 농담을 하면서 막 웃은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그 당시 피아노 레슨을 해서 받으신 돈은 한사람 한 달에 7000원이었다.


어머니가 한 달에 7000원을 벌기 위해 만들어진 동생 이마의 흉터...


얼마 전 내가 수현이에게 이마의 상처를 지우지 않을 거냐고 물었다.


50이 다 되었어도 20대 배우같이 예쁜 내 동생...


미국 뉴욕에서 미술 학원을 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내 동생...


" 다 나이 드니깐... 상처도 추억이야. 옥에 티인데... 괜찮아 워낙 예쁜 옥이니깐..."


네 여인이 Soo 이마의 상처를 볼 때마다 떠올린 그날 "아기 눈깔 빠질 뻔한 날"에 대해 수십 번을 되새긴 추억담에 동생은 이마의 상처를 지우지 않고 놔두었다.


집으로 돌아와 엄마는 현관에 내버려진 " 흉기 책상" 을 보시고는 둘째 언니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다.


"아빠 오시면 모서리 갈아달라고 하자. 아빠가 액자 만드는 도구로 모서리 부드럽게 해 주시면 이 책상 다시 쓸 수 있어"


주말이 돼서 아버지가 서울로 오셨을 때 아버지는 마술사처럼 책상의 모서리를 둥글게 갈아주셨다.


"아빠 수현이 이마에 난 흉터도 갈아버릴 수 있어?"


내가 아버지께 물었다.


" 그렇게 할 수 있는 도구가 아마 미래에는 나올지도 몰라"


이 책상은 내가 독일로 유학 가던 1995년까지 우리 집 한구석에 있었다. 왜냐하면 Hyon 언니가 주워온 이 "흉기의 책상"이 바로 Hyon 언니를 서울대 조소과에 입학시킨 "서울대 책상"으로 둔갑했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마술사 같은 손이 "흉기 책상" 을 "서울대 책상"으로 바꾸었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린 이 책상을 버릴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들면 상처도 추억이 된다는 예쁜 내 동생...


그리고 흉기 책상에서 공부해서 서울대를 넉넉하게 들어간 의리에 넘치던 둘째 언니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사태를 수습했던 큰언니...


그리고 40 킬로의 몸으로 7000원을 벌기 위해 피아노를 가르치시던 나의 어머니...


마술사 같은 손으로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던 아버지 조영동 화백...


모든 것이 너무나 그립고 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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