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는 약속을 어길 수도 있어

약속이 깨는 신뢰의 결과

by 구쓰범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후배 상가에 조문을 하러 가야 하는 일정이 떠올랐다.


식사를 간단히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와 조의봉투까지 세심하게 챙겼다. 이제 갈 곳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출발하면 된다. 카톡을 열어서 경조사 공지문을 확인한다. 장소는 알았고, 그런데 평소와 달리 발인 날짜가 눈에 들어온다.


아뿔싸 오늘 12시다. 1시간 안에 갈 엄두를 낼 수 없는 거리였고 결국 후배에게 전화를 건다. 내가 일정을 잘못 알았다고. 미안하다고. 가뜩이나 장례식이고 이제 막 발인을 준비하고 있던 와중이었는지 목소리에 힘이 없다.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더군다나 막 나서려다 확인하고서야 알았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더 화가 난다. 조금만 더 확인을 했더라면 어제 다녀올 수도 있었는데 하는 자책이다.


간혹 이런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다. 원인을 살펴본다. 상대에 대한 관심의 경중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마침 이 후배도 평소 연락이 많지는 않았던 터라, 부고를 보는 순간 '상가에 들러봐야겠구나'하는 정도로 소홀히 여기고 하던 일을 계속했던 게 떠오른다.


그러다 보니 어제를 넘기고 오늘에서야 생각이 난 것이다. 만일 반드시 가야 한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면, 부고를 좀 더 꼼꼼히 봤을 터이고 일정을 놓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관심의 정도가 사람에게 실수를 유발하고, 내심을 들키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후배의 상가에 들르지 못한 나의 통화가 후배에겐 어떻게 들렸을까. 진심으로 미안했고, 최선을 다하려 했다고 보였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가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해프닝으로 넘어가겠지만, 이런저런 자리에서 나를 볼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들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속내를 들킨 것 같은 마음이 이런 것이다. 겉으로 하는 표현과 실제로 속에 가지고 있는 마음이 다를 때 이런 행동과 실수가 나오기 때문에 그 어긋남은 어쩔 수 없이 들키고 마는 것이다.




약속을 하면 항상 임박해서든지 아니면 당일에 다른 사정이 생겨 못 온다고 양해를 구하는 사람이 있다. 나에게만 그런 줄 알았는데,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딱히 나에게만 하는 행동이 아니다.


한두 번씩은 다들 겪어봐서 '그 친구는 무척 바쁜가 봐. 약속을 어기는 일이 반복돼서 약속 날이 되면 불안해'라고 말한다. 그나마 젊잖게 말하는 사람들의 표현이 이렇고, 어떤 이는 '그 사람은 저 혼자 일을 다하나 봐. 매번 무슨 핑계가 그렇게 많아' 라며 불만을 드러낸다.


어쩌면 그 사람은 우리에 대한 관심이 덜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괜히 그에게 다가가고 있는 건 아닐까.



간혹 중요한 일정이나 약속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바쁜 일정 속에 살다 보니 의도치 않은 실수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런 착오를 가볍게 보아서는 절대 안 된다. 그건 단순한 주의력이나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관심과 존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한 번의 실수로 치부하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넘어가려할지 몰라도, 약속을 허공에 날려버린 상대가 어떤 생각으로 나를 보게 될지가 문제인 것이다. 그런 일을 겪은 사람에게서 나에 대한 신뢰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일 뿐이다.


그래서 신뢰관계가 중요한 사람들 간에는 작은 실수조차도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번 깨진 신뢰를 회복하려면 그 보다 더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종 21년, 개화파는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군사적 지원 약속을 믿고 정변을 단행했다. 그러나 청나라의 반발이 예상보다 거세지자 일본 공사는 태도를 바꿔 철군을 결정한다. 이에 놀란 김옥균이 따진다. "당신의 약속만 믿고 거사를 치른 것이외다. 그런데 혼란의 와중에 갑자기 철군을 한다니 말이 되는 소리요? (한국문화연구회, 2025).


일본 공사는 설득을 하기 위해 궁중에서 병력을 빼더라도 군사고문 파견, 삼백만 원 차관, 재정고문 제공, 근위대 훈련을 약속했다. 하지만 곧 청국 군 1천5백 명이 궁궐로 기습해 들어오자 생각은 급변한다.


청국 군과 조선군의 공격을 받자 일본 공사는 결국 왕을 호위하던 군대를 철수시키겠다며 지금까지의 약속을 파기한다. 이로써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망명을 결심한 정변세력들은 일본 공사와 함께 일본 기선에 탑승한다. 하지만 조선이 김옥균 등을 하선시키라고 압박하자 기회주의자인 일본 공사는 이때도 김옥균 등에게 하선을 요구하는 비겁함을 보인다. 다행히 일본인 선장이 하선을 반대해 무사히 망명길에 오르게 되지만, 그로부터 10년 뒤인 1894년 김옥균은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였다가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며 생을 마감한다.


약속에 기대어 시작된 거사는 깨진 약속과 함께 비극으로 종결되었다.




조직 생활로 가보면 이런 신뢰관계는 상사와 부하 간에도 존재한다. 보통 부하가 상사와의 약속을 어긴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그 순간 믿음이 사라지고 평가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상사가 약속을 쉽게 바꾸거나 어기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상사는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부하가 들어야 하고 감수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게 맞을까?


약속은 상대와의 일종의 계약이다. 그 약속을 위해 다른 일정이 밀려나고 우선순위가 바뀐다. 그렇게 만들어진 약속이 파기될 때 상대가 입을 손실을 파기자는 과연 헤아리는지가 의문이다.


당연히 상사도 부하의 일정을 존중하고 그의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면 함부로 약속을 어기거나 일정을 변경하는 일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A는 회사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다. 모든 일이 그의 손을 거쳐야 의사결정이 되는 구조였다. 그는 많은 회의를 통해 결정을 내렸고, 사람들은 일을 마무리하려면 반드시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바쁜 A의 회의는 하루 종일 이어졌고, 하나가 늦어지면 다음 회의들이 줄줄이 지연되곤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음 일정과 약속이 있지만 그런 건 A의 관심 밖이었다.


자신이 이해될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 때문에 다음 회의 참석자들은 회의실 앞 복도에 진을 치고 기다려야만 했다. 그 대기 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자괴감이란 걸 A는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일하는 방식으로 성공한 그는 지금도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복도에 늘어선 사람들의 시간과 마음의 무게가 내 머리를 누른다.




약속은 시간과 마음의 교환이다. 개인적 약속을 가볍게 깰 때, 상대는 일정만이 아니라 존중받을 권리까지 함께 잃는다. 결국, 약속은 내가 상대를 우선순위에 두겠다는 공개 선언이나 다름없다. 오늘 내가 저지른 작은 실수 하나가 누군가의 마음에 어떤 흔적을 남길지를 떠올리며 약속을 대해야 한다.


특히 큰 권한을 가진 사람일수록 약속 윤리에 더 엄격해져야 한다. 위치가 높을수록 그가 파기한 약속의 파급효과가 더 넓게, 더 깊게 퍼져나감을 알고 주의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장례식장을 찾지 못한 후배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keyword
이전 04화착한 상사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