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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연애에 물들다

연애에 스며들다, 교토 3

by Dear Lesileyuki Mar 06. 2025

 며칠 전 갑자기 그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스미마생…. 오랜만에 소식을 전합니다. 여행에서 돌아왔습니다. 당신이 말한 발리는 좋았습니다. 신들의 정원이라고 했지요? 그곳에는 감사와 축제가 가득한 곳입니다. 매일 아침 신에게 바쳐지는 꽃과 과일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소중한 하루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도 매일 축제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교토라는 도시에서 사는 나나,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아갈 당신이 그들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겠지요. 비의 커튼이 발리의 숲과 들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지나간 자리마다 흔적을 남겼습니다. 꽃잎으로, 푸른 야자나무 가지로…. 발리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스콜이 지나가고 바람과 함께 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순간 생각했습니다. 아, 덧없구나. 모르게 휩쓸려 가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친구를 잃었습니다. 그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행복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고 떠났습니다. 그에게는 아주 특별한 여자친구가 있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여자친구는 아마도 영원히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으로 인해 친구에게 섬광처럼 빛나는 순간이 있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나는 친구와 한 약속을 지킬 생각입니다. 그리고 프로작도 먹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제 프로작을 통해 억지로 행복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당신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말해도 될까요?

발리에서 나는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에게 다정한 키스를 전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야스 무사.     

 그의 이메일을 읽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나야말로 다정한 키스를 날리고 싶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메일을 통해 그의 온화한 마음이, 조심스럽게 숨긴 감정의 결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영상 일기에 발리의 사원과 호텔의 정원에 떨어진 꽃들을 올려놓았다. 파도에 의해 동글동글해진 초록과 푸른색의 유리 조각 사진과 함께 '자카르타 PM 3:00 비의 커튼이 지나간 후’라는 글을 올렸다. 


우유를 먹기 싫어한다고 하자 그가 알려준 방법대로 인스턴트커피와 설탕을 세 스푼을 넣은 우유를 마시며 생각했다. 그를 보러 가자고. 아니 교토에 일단 가자고. 나는 녹지 않은 커피 가루를 입안에서 굴리며 생각했다.     

모처럼 찾아온 이준에게 일본에 가겠다고 했더니 갑자기 그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나를 빤히 봤다.

“뭐라고 일본을 가? 누구 맘대로?”

“사장님 맘대로. 회사 일로 출장 가. 그런데 왜 내가 추궁을 당해야 하지?”

“젠장, 동족상잔의 비극은 내가 감수하겠으나 해외유출은 좀 그렇다. 가는 김에 아주 그치도 만나고 오지 그래?”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물론 가능하다면”

“왜 이렇게 월드컵 축구에서 일본에 졌을 때랑 기분이 똑같지? 아니, 내가 그 뭐냐….”

급하면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는 이준이 갑자기 귀엽게 보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화가 나거나 참을 수 없을 땐 말을 더듬어서 종종 어버버 이준이라고 놀림을 당했었다. 

“지수, 지금 너도 모르는 사이에 바람이 반쯤 빠진 풍선처럼 물렁물렁해져서 이상해. 그거 알아? 정신 차리고 심호흡을 하고 다시 생각해 봐.”

“진정해. 네가 키우는 강아지 가루처럼 씩씩대지 말고. 내가 일본에 가는 것은 첫째, 일 때문이야. 내가 원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회사가 가라고 해서 가는 거야. 두 번째, 이메일로만 알던 사인데 한 번쯤은 보고 싶어서 가는 거야.”

“이멜? 니들이 무슨 사무적인 관계냐? 차라리 러브레터가 맞지, 싶다. 암튼 난 홍지수에게 껌처럼 평생 붙어 다닐 테니까 알아서 해. 그리고 항상 보고 싶어 해야 하는 사람은 나여야만 해. 왜냐고 묻지 마. 나는 그런 자격이 있어. 시간으로 보나 인과관계로 보나!”

서슬이 시퍼래서 입에 거품까지 물 것처럼 떠들어대던 이준은 결국 공항까지 나를 데려다 주기 위해 아버지의 차까지 빌려 가지고 왔다. 새벽부터 비가 내려서 우울해지려던 마음이 이준이 일부러 스타벅스까지 들려서 사다 준 캐러멜 마키아토 한 잔에 사라져 버렸다. 나는 입이 잔뜩 나온 채 앞만 보고 운전하는 이준을 보며 웃었다. 

“쭌 고맙다”

“지랄. 팔자려니 생각하고 하는 짓이니까 감동할 거 없어”

“넌 정말 좋은 친구야. 죽 그랬어.”
 “친구 싫어. 우리 엄마가 뭐라는 줄 아냐? 점을 봤더니 전생에 내가 말몰이꾼이었단다. 그리고 너는 4가지가 부족한 말이고. 그래서 내가 지금 죽자 살자 너만 쫓아다니는 거란다, 그러니 팔자니 안 그래?”

“그 4가지 없는 말이 잡힌대?”

나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아, 몰라. 돌아오기나 해. 온전한 정신으로,”

이준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갑자기 비가 거세지고 천둥소리가 들렸다.

“이것 봐, 하늘도 노하시네.”

그가 나를 보더니 씩 웃었다.      

간사이 공항에 착륙하기 전 나는 각오했다. 교토의 하늘 아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담담히 받아들일 거라고. 간사이공항에 내리자마자 나는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물론 출장 때문에 왔다고, 그러면서도 그와 만날 순간을 상상했다.

먼저 아라시야마에 가기로 했다. 일부러 그곳에 호텔을 정했다. 교토에서 40분을 더 가야 있는 아라시야마와 그가 말한 가쓰라 강을 가로지르는 도게츠 다리를 만날 수 있다. 그가 산책한다는 대나무 숲이 혹시 치쿠린이 아닌가 싶어서 일부러 가까운 곳에 호텔을 정했다.

그가 영화 <게이샤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말한 대나무 숲, 치쿠린이 그곳에서 멀지 않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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