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 스며들다, 교토
연애, 물들다.
나는 20대의 절반을 ‘사랑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보냈다.
그것은 정말 용감한 생각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그 이유는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그냥 사랑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형상이 하나도 없었다. 사랑은 그저 환상이며 풍경을 찍어 놓은 필름을 실수로 햇빛에 노출시키는 바람에 모두를 일순간 날려버리는, 찰나적인 것이라고 여겼다. 내가 봤던 영화 ‘러브스토리, 타이타닉, 사랑과 영혼.
물론 나를 좋아했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몇 번의 시뮬레이션이 있기는 했으나 문제는 언제나 지속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사랑하는 것이 귀찮았다. 사랑이 지는 것보다 내가 키우는 재스민꽃이 지는 것이 더 안타까운 시절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사랑을 피워낼 자신이 없었다. 내게 사랑은 눅진한 누가 크래커였다.
나를 스쳐 지나가 남자들에게서 필연이라는 운명의 향기를 맡아보지 못했다. 아마 나는 그때 사랑은 분명 불가리안 장미처럼 향기가 날거리 생각을 했었나 보다. 그래서 괜찮은 사람을 엄마 말처럼 죄다 놓쳤는지도 모른다. 인정한다. 지나치게 낭만을 강조하는 바람에 평범하게 다가온, 함께 살아도 괜찮은 사랑을 모두 놓쳐버렸다는 것을.
얼마 전 결혼한 친구의 집들이에 갔다가 화제가 된 이야기가 있다. 결혼 안 하고 살려면 최소한 10가지 이상의 음식 레시피는 알아야 하고 요일마다 바꿔서 만날 수 있는 남자를 포함한 친구가 7명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핸드폰에 깔린 배달앱이 의식주를 다 해결해 주기 때문에 레시피는 필요 없고 친구도 일주일 내내 만나줄 수 있는 단 한 명의 친구가 있기에 7명까지 필요 없다.
그 단 한 명의 친구는 바로 시인 지망생 이준이다. 그는 아마도 일찌감치 각서를 써준 죄로 십수 년을 내 곁에서 맴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남자친구라기보다는 허물없는 초등학교 동창생 정도의 감정을 느낄 뿐이다. 그와 나 사이에는 일말의 로맨틱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그와 나 사이에는 절대 전기가 통할 수 없는 부도체가 깔린 듯한 느낌이다.
그가 내게 각서를 써준 이유, 엄밀히 말하자면 그와 그의 부모님이 엄마에게 각서를 써준 이유는 온전히 어린애 장난이 부른 유치한 사고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그와 내가 짝이 되면서 발생했다. 곱상한 이준은 소심하고 키가 작았다. 반면 덩치가 크고 극성스러웠던 나는 병약해 보이고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는 이준이 맘에 몹시 맘에 안 들었다. 책상에 줄 긋고, 넘어오면 사정없이 샤프로 내려찍어버리고, 키 작다고 공개 망신 주는 게 예사였던 나의 횡포에 대한 보복으로 그는 어느 날 중차대하고 그로서는 평소엔 상상도 못 할 엉뚱한 사건을 일으켰다.
그 사건이란 다름 아니라 애들 사이에서 한참 유행하던 똥침 주기였는데, 문제는 이준이 의자 사이에 연필을 교묘하게 끼워 놓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연필은 그가 미술학원에서 쓰는 연필이었기에 범인이 누구인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체육 수업이 끝난 후 수선스럽게 앉던 나는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아픔에 기절할 것 같아서 멍하니 이준을 바라보다 기절했다. 그 아픔은 처음 경험해 보는 종류의 아픔이었다. 그런데도 울음을 터트린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준이었고 선생님은 119를 부를 경황도 없이 나를 둘러업고 아파트 단지 내 있는 한사랑 산부인과로 달렸다. 몽롱한 가운데 울면서 쫓아오는 이준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그날 아니 그날 이전과 이후에도 한사랑 산부인과에서 내가 가장 어린 손님이었을 것이다. 의사는 이준의 머리부터 한번 한번 쥐어박은 후 ‘앞으로 평생 책임 질 거냐’냐며 물었다. 그러자 이준은 눈물 콧물 범벅인 된 얼굴로 끄덕이며 울었다. 선생님은 심각한 얼굴로 이준을 바라보다가 연락을 받고 달려온 엄마의 기세에 눌려 어쩔 줄 몰라했다.
의사는 엄마와 선생님에게 어쩌면 커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고, 그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극성스러움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엄마가 노발대발한 것은 너무나 당연지사였다. 엄마는 연락을 받고 달려온 이준의 부모님에게 각서까지 쓰게 했다.
내용인즉 ‘만약 의사의 소견처럼 일이 발생할 시에는 당연히 책임진다. 그리고 ‘을’ 이준은 ‘갑’ 홍지수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절대 결혼하지 않는다. 뭐 그런 각서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엄마는 이준의 손도장까지 찍어가면서 진지하게 작성하고 공증까지 받아두었다. 살벌한 분위기에 나는 어리둥절했고, 엄마 손에 잡혀 강제적으로 손도장까지 찍힌 이준은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별일 없이 끝난 그 일 덕분에 나는 극성스러운 엄마의 시선에서 다소나마 자유로울 수 있었다. 위로 두 언니는 엄마가 지인이 하는 최상의 인연을 찾아주는 결혼 매칭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근사하게 해치워졌고, 지금은 본인들이 이루지 못한 꿈을 아이들에게 투영시키며 대치동으로 ‘미래의 꿈나무’를 실어 나른다. 그러나 나는 집안의 막내기도 하지만 이준의 각서 건도 있고 해서 어느 정도는 엄마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얼마 전 오빠가 나이 마흔에 결혼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독립을 했다. 사실 모두가 시집살이를 거부하는 21세기에 자청에서 집에 들어와 산다고 했을 때 나는 귀를 의심했다. 언니들은 분명 꿍꿍이가 있을 거라는 색안경을 장착하기 시작했지만, 우리 집이 재벌도 아니고 그런 권모술수형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진 것이라고는 달랑 엄마가 사는 3층 상가주택뿐인데 고작 그거 하나 챙기자고 엄마처럼 까다로운 사람과 살겠다는 것은 그저 성격이 보살이라서 그런 거라고 언니들에게 말했지만, 아직도 색안경을 쓰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이준이 아니었다면 나는 엄마의 야심 찬 결혼 프로젝트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분명 엄마의 등쌀을 견디다 못해 벌써 외국으로 튀었을 테니 그 점은 이준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그래도 그날의 아픔은 가끔 생각난다. 이준의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도.
IT 회사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팀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하는 덕분에 엄마에게 오피스텔 월세를 내고 당당하게 큰소리치고 살 정도는 된다. 주식이나 코인 같은 것은 근처도 얼씬거리지도 않고 카카오뱅크의 6주 적금이나 드는 정도에 만족한다. 휴일에는 소파와 일체가 되어 넷플릭스, 왓챠 같은 OTT를 온종일 본다.
가끔 이런 나의 일상이 후추와 소금을 뺀 크림수프를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러면 잉위맘스틴의 기타 연주를 크게 틀어놓고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거나 영화 <그린파파야향기>를 연속해 본다. 화면을 가득 채운 초록빛이 전해주는 청량함과 싱그러움이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하는 주인공에게 투영된 것 같은 영화는 내 생활의 인센스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영화 속의 10살 소녀 무이의 은근하고 신뢰에서부터 시작된 잔잔한 사랑이 아름다워 종종 향을 피우듯 플레이 버튼을 눌러 영화를 집안의 배경처럼 깔아놓는다. 영화 속 잔잔한 음악과 여름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종일 어슬렁거리는 나의 삶에 만족한다.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다에 한 번쯤 나의 친구 이준이 안부 전화 겸 소식을 전한다. 아니면 메일로 장문의 편지를 보내거나 최근에 쓴 시를 보낸다. 구태의연하다고 면박을 주면서도 나 역시 그런 그의 유희를 즐긴다. 그는 아직도 시인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가끔 나는 이준과 내가 이인삼각으로 묶여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옆을 보면 언제든 이준이 있었기에.
내 인생의 해안가에는 낭만적인 파도가 밀려올 기미조차 없다. 그러나 일을 제외하면 조용하고 지루하기까지 한 나의 일상에 재미있는 일이 발생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그날도 퇴근 후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배달의 민족에서 닭발을 주문한 후 노트북을 켰다. 기다리는 동안 밥 친구로 유튜브 영상을 보기 위해서다. 주로 보는 것은 여행 유튜브 채널이다. 구독은 하지 않고 그냥 본다. 스치듯 보는 것에 의미 두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리즘이 새로운 채널을 띄웠다. 화면 가득 그린파파야향기, 아니 영화 속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실내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교토에서 식물을 키우는 남자의 브이로그였다. 아무리 초록에 환장했다고 해도 ‘프로작’이란 이름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냥 스쳤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다큐멘터리에서 ‘프로작’이란 약에 관해 다룬 덕을 본 적이 있다. ‘행복해지는 약’이라고 불리면서 캐나다를 비롯한 서구의 예술가나 젊은 층이 습관적으로 복용한다는 그 약은 부작용이 별로 없어서 단속하기에도 애매한 약이라고 했다. 행복감을 느낄 수 없어서 약을 먹는, 물리적인 방법을 통해 행복해지려는 사람들. 약국에서 돈을 주고 행복을 사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박혀 있지 않았다면 그의 브이로그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보여주는 집안이 온통 초록이었다. 제법 큰 미모사를 실내에서 키우고 있었다. 심지어 노란 꽃이 활짝 피어 햇살 아래서 황금빛으로 빛났다. 그 미모사와 프로작 때문에 나는 구독 신청을 하고 ‘좋아요’를 눌렀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 하트를 날린 것은.
프로작을 찾습니다.
잉베이 맘스틴과 스팅을 좋아합니다. 다시 연락해 주시면 마카로니웨스턴이란 특제 스파게티 비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메일을 보내주셔도 좋습니다.
다나카 야스무사
교토에 사는 야스무사와의 인연을 그렇게 시작되었다.
행복해지는 약을 찾는다는 그에게 나는 그에게 나는 본능적으로 호기심을 느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에 기분이 묘했다. 항상 인간관계의 확장은 원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하게 말했고, 회식도 각자 집에서 줌으로 하자고 우겨서 상사를 열받게 하던 나였다.
그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프로작’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며칠을 고심한 끝에 나는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식물 집사처럼 보이는 그는 어쩌면 단순히 육체적으로 행복해지는 약을 찾는 게 아니라 정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그의 초록의 매혹이 가득한 거실에 홀려서, 그리고 누구에게도 느껴본 적 없는 ‘염려’가 여러 날 동안 충돌한 끝의 결과였다. 그리고 웅크리고 있던 초록빛 눈을 한 검은 고양이 때문이기도 했다.
오래전 나도 그런 눈빛을 한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가 키우던 길고양이였다.
‘프로작을 남용하지 마세요. 행복해지려면 발리로 여행을 떠나볼 것을 권합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치료법 중의 하나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치료사 홍지수’
나는 그에게 그렇게 행복해지고 싶으면 발리로 여행을 가라고 권했고, 내가 가봤던 발리에 관한 짧은 감상문을 보냈다. 분명 우울증 말기의 환자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
아버지가 깊은 우울증으로 생을 마감했기에 나는 그 마음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어린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말이 없으셨고 세상에 저항하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무기력했다. 늘 고양이만이 아버지의 곁에 머물렀다. 그리고 아버지가 생을 마감하던 날에도 고양이만 곁을 지켰다.
‘그날’ 제일 먼저 아버지를 발견한 사람은, 방과 후 활동을 빼먹고 학교에서 일찍 돌아온 나였다. 커튼이 쳐진 거실에서 아버지는 잠자듯이 누워 계셨고, 고양이가 아버지 곁에서 웅크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록의 눈 고양이가 나를 보며 ‘야옹’하고 울었다. 나는 그런 고양이게 사료를 주고 친구들과 놀러 나갔다. 나는 아직도 나를 향해 울던 고양이의 눈빛을 기억한다.
사실 그가 답장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그저 일말의 측은지심에 ‘위로자’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 내 말 한마디가 전해져 위로될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그때가 모두 잠든 새벽 3시였고, 가끔 나는 대책 없는 감상에 빠질 때가 있는데 바로 그때였던 것 같다.
그가 이메일을 보내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난 후였다. 그의 희한한 이름의 ‘마카로니웨스턴 스파게티’ 조리법도 함께 적어 보냈다. 마카로니와 스파게티를 함께 사용해 조리한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나의 프로작에게,
당신이 알려준 발리로의 여행은 한 번 생각해 볼 만한 것 같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함께 발리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의 메일은 잘 받았습니다. 지금 이곳은 온통 하늘이 벚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갑자기 벚꽃 나무 밑에는 시체가 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아름다운 꽃잎들의 시체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벚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시한부 소녀의 미소처럼 슬프도록 아름답지만 허무하죠. 아, 스미마셍. 잠깐 감상적으로 됐습니다. 바람에 날리던 벚꽃이 유리창에 부딪히더니 나풀나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당신은 감상적인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약속대로 마카로니웨스턴 조리법을 알려드립니다. 숟가락으로 떠먹을 수 있는 스파게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이메일에 답을 주신다면 다음엔 블루베리 머핀을 맛있게 구울 수 있는 레시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당신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난 어제 당신 때문에 행복해지는 약, 프로작을 복용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온종일 발리에 관한 책과 유튜브만을 봤기 때문이지요.
어느새 나는 그에게 ‘나의 프로작’이 되어 있었다.
그의 메일을 읽는 순간 낯선 소년에게서 편지를 받은 소녀처럼 설레는 감정을 느꼈다. 이전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감정이라 적잖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 나의 마음을 그랬다. 그는 내게 잉베이 맘스틴의 기타 연주를 가장 멋지게 들을 수 있는 때는 자정이 넘어서라든지, 나팔꽃을 아름답게 키울 수 있는 법 등 여러 가지 시시콜콜한 일상들을 메일로 보냈다. 새벽에도 메일이 도착할 때도 있고, 어느 일요일 아침엔 일어났느냐며 모닝커피를 맛있게 내리는 법을 알려줄 테니 바로 시작해 보라고 재촉하기도 했다.
일요일에는 늦게까지 침대에서 빈둥거리며 숏츠나 보는 것이 일상이었던 내가 야스무사라는 남자 덕분에 일요일 아침부터 스타벅스로 원두를 사러 갔고 결국엔 그가 알려준 대로 원두를 내리고 딸기잼과 클로티드크림을 잔뜩 얹은 프렌치토스트를 만들었다. 나는 창가에 앉아서 커피와 프렌치토스트를 먹으며 생각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남자 때문에 아침부터 부지런 떨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작은 오피스텔 안에 가득한 커피 향과 달콤한 딸기잼 냄새 때문에 건조한 크래커 같던 나의 일상에서 어느 정도는 로맨틱 지수가 올라간 걸까?
오후 11시쯤 불시검문처럼 이준이 갑자기 수선화 한 다발과 포트와인을 들고 찾아오더니 롯데월드로 스케이트를 타러 가자고 했다. 아직도 시인이 되지 못한 그는 분위기와 차림새만 보면 이미 시인처럼 보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원에 적을 둔 채 공부는 뒷전으로 팽개치고 돌아다니는 이준은 정말 언젠가는 시인이 되고 말 작정인 듯했다.
“커피 한 잔 주라. 아침부터 기름진 버터와 딸기잼 냄새가 어우러진 근사한 냄샌데. 익숙하지 않은 이 냄새는 뭐지? 너는 일요일 아침은 항상 맥 모닝이었잖아?”
“지랄, 너는 여기가 무슨 어쩌다 서는 간이역인 줄 아니? 생각나면 들리게. 그리고 너, 그 말도 안 되는 시 제발 메일로 보내지 마라. 내가 스팸메일 처리를 하든지 해야지. 일요일 아침에 불쑥 나타나는 것도 그만해라. 남들이 보면 오해해.”
“나야 땡큐지. 그리고 이미 오해하는 것 같던데. 헤헤헤”
이준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그가 알려준 비법 레시피의 프렌치토스트와 커피를 이준에게 건네고 나도 한 잔 더 따라 마셨다. 아침에 내려놓은 커피치고는 맛과 향이 근사했다. 역시 그가 추천한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라서 그럴까?
“오, 아침 한 상! 오늘은 인심이 후하네?”
프렌치토스트와 커피 그리고 블루베리가 곁들여진 그릭요거트가 놓인 트레이를 보더니 싱글거리며 말했다. 내가 봐도 제법이었다. 이 정도면 나에게도 가히 혁신적인 브런치이다.
“처먹기나 해라. 그리고 다시 말하는데 그 유치 찬란한 시는 그만해. 어머님이 걱정하신다.”
“왜? 그거 연시라는 건데. 나는 너라는 해안가를 향해서 달려가는 파도야. 부서져도 다시 달려가고….”
“그 정도면 지랄도 원플러스 원이다.”
“넌 끊임없이 내 상상력을 자극하는 에스메랄다야.”
“그럼 넌 노트르담의 꼽추, 콰지모도냐? 그거 비극인 거 알지?”
“아니, 너와 나에게 비극은 없어.”
그가 얄밉게 시나몬 토스트를 한입에 넣으며 약 올리듯 말했다.
나는 그런 이준을 무시한 채 노트북을 켜고 잠시 미루었던 일을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내가 없어도 언제나 혼자서 잘 지내다가 이런저런 청소와 정리를 해준 후 소리 없이 사라지곤 했다. 이준과 나는 그런 사이다. 있어도 없는 것처럼 편하고, 없어도 빈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둘 사이에는 존재한다.
“이게 뭐야?”
어느새 이준이 가스레인지 옆에 걸어둔 프린트를 가지고 와서 흔들었다.
야스무사가 보낸 이메일을 프린트한 것이었다.
“보이는 그대로. 스파게티를 만드는 방법.”
“짓수, 일본에 아는 사람, 있어?”
그가 힘주어서 네 이름을 ‘짓수’라고 부르는 것은 빈정 상했다는 증거이다.
“살다 보면 사랑이 문득 지나가기도 해. 그런데 말이지….”
또 ‘지나가는 사랑’ 타령 시작이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야. 지구촌 한 가족이 된 지는 이미 오래됐지.”
나는 짧게 대답하고 다시 밀린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 너 일본에 간 적도 없잖아.”
“무식하기는. 그래서 그대는 시인이 될 수 없는 거야. 상상력이 거의 빙점 이하 수준이니.”
“어떻게 만났는데?”
이준이 뚱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의 입가에 묻은 시나몬 가루와 설탕 때문에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참았다.
“SNS”
“헐, 미쳤네. 이야 홍지수 다시 봤다. 이건 뭐냐? 커피를 맛있게 끓이는 법? 아스파라거스를 맛있게 먹는 법? 뭐야, 이 친구 요리사야? 되게 일없는 놈이네.”
“이준, 조용히 말할 때 입 다물어. 너는 그런 상상력으로 백날 응모해도 시인이 되기는 글렀으니 은행에나 취직해라. 재무제표나 만들고 있는 것이 딱 맞아.”
이준은 신랄한 나의 말투에 약간 기가 꺾인 듯했으나 다시 걸고넘어지려고 프린트를 일기 시작했다.
“나의 프로작? 어이구 이건 뭐래? 프로작, 이거 포커판에서 쓰는 단어 아냐?”
그가 이죽거렸다. 심사가 뒤틀린 것이 한눈에 보인다. 이준은 이제 내게 똥침을 찌르고 울음을 터트리던 남자애가 아니다.
“이쯤 되면 이준의 정신승리다. 많이 컸다. 심통 그만 부리고 꺼져라. 안 그러면 경비아저씨 부른다.”
나는 그의 얼굴에 묻은 시나몬 가루와 설탕을 휴지를 닦아주며 말했다.
“잠깐만, 너 혹시 연애하냐? 맨날 컴퓨터와 노트북 끼고 살더니 이젠 연애도 노트북으로 해? 아서라 절대로 안 돼. 홍지수, 그럼 약속 이행 방해죄로 증말 고소한다.”
이준이 드디어 또다시 우리 엄마에게 써준 각서 건을 들고 나왔다.
“왜 안 나오나 했다. 그 말!”
“짓수, 명심해라 우리 집 이사가 가면 동사무소보다 어머님께 제일 먼저 주소변경 고지했고, 어쩌다 늦으면 못 참으시고 사람 풀어서 뒷조사하셨다는 걸. 난 대학 때 소개팅은 한 번도 못 했다. 너 뒤 따라다니느라고. 이건 정말 너무나 억울한 일이야. 어떤 식으로든 보상받아야 해. 여차하면 위자료 청구한다.”
“내가 언제 그러라고 그랬어? 니가 그런 식으로 장난만 안 했어 봐.”
“어쨌든 난 너 사랑한다. 너는 나에게 유일무이야. 그러니까 책임을 져야 해. 내 인생을.”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 하고 있네. 난 사랑 같은 거 안 믿어. 특히 유일무이 어쩌고 하는 그 말! 우리 아버지를 봐. 유일무이 병에 걸려서 가정 던져버리고, 좋은 꼴 많이 보이고 가셨다. 해서 나는 그 영속성을 절대 믿지 않아. 다행히 지금까지 내게 사랑이란 것이 스쳐 지나가지도 않았고.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두드러기 날 것 같으니까.”
불륜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자식들을 두고 말도 안 되는 멜랑콜리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막내딸 눈에 마지막 모습을 보인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사랑은 이기적이며 때로는 폭력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마도 그날 오후 내가 본 아버지의 모습이 뇌리에 날카롭게 각인된 탓일 것이다.
“홍지수, 사랑은 두둑처럼 슬그머니 와서 너도 모르게 마음을 훔친다는 거 모르는구나. 언젠가 너도 그 도둑한테 보기 좋게 당할 날이 있을걸. 그때는 이 오빠가 든든한 어깨를 빌려주지. 어차피 나 이외의 사람과는 새드엔딩일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나는 호기롭게 말했다. 그런 나를 보며 이준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왠지 그런 일이 이미 발생한 것 같다. 느낌이 그랬다. 퇴근해서 돌아오면 항상 그가 메일을 보내던 시간에 맞춰서 이메일을 확인했고, 심지어 불규칙적으로 이메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주일째 그는 이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나의 프로작에게’라고 시작되는 그의 이메일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고, 그의 브이로그도 업로드되지 않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일까? 내가 보내는 이메일도, 디엠도 확인하지 않고 있다. 마치 소식을 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행복해지는 다른 약을 찾은 걸까? 아니면 프로작을 한 알에서 두 알, 두 알에서 세 알, 그렇게 약을 늘려가며 그렇게 약을 늘려가며 행복을 찾기로 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우울증 때문에 아버지와 같은 선택을 한 것일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베일처럼 내 주변을 감싼다.
한동안 나는 일부러 그와 접속하지 않기로 했다. 매일 밤 그의 메일을 확인하는 내가 싫었고 자존심도 상했다. 그리고 그와 내가 감정적으로 얽히고 내가 더 그의 이메일에 집착한 것 같아 짜증이 났다.
결국 나는 인위적으로 그에게서 나를 분리하기로 했다. 될 수 있으면 혼자 있지 않고, 일에 관계되지 않으면 컴퓨터와 노트북 심지어 핸드폰까지 집에 돌아오면 건드리지 않았다. 모든 것을 오프상태로 만들었다. 그러다 보면 나의 마음도 자연스럽게 오프상태가 될 거로 생각했다. 가끔 내 눈에 enter, delete, return 같은 단어들이 어른거리기는 했지만 이런 감정 상태는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여기며 사전에 차단해 버렸다. 절대 아버지가 빠졌던 늪에 빠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야스무사’라는 남자에게 서서히 희석되어 스며드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고, 아무런 퍼스 널 데이터도 없는 ‘초록빛 거실의 남자에게’ 무작정 끌린다는 것이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녁에 이를 닦다가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니가 미쳤구나’ 하며 뺨을 스스로 때릴 정도였다. ‘미모사가 문제야’라고 중얼거리며 노려봤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수아가 한동안 탐색하듯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내게 물었다.
“요즘 무슨 일 있어? 꼭 시동 꺼지기 직전의 내 차처럼 불안해 보여.”
수아는 노란 빨대를 질겅질겅 씹고 있는 나를 처음부터 죽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유치원 이래 죽 붙어 다닌 수아를 속이는 것은 불가능이다.
“내가 그래 보여?”
“약간. 미묘한 파장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너처럼 이성 파가 웬일이야? 뒤늦은 연애라는 것을 하는 거야? 초보의 감정이 새어 나오고 있어”
“연애는 무슨.”
“하기야 무슨 위성처럼 맴돌며 밀착 방어하는 기준이 있는 한, 어렵지. 근대 너희 결혼은 할 거니? 요즘은 연애 진입장벽이 높아서 동호회 가입해서 짝을 찾는데. 생각을 해봐. 달리기 동호회에 가입해 매주 죽도록 달려야. 짝을 만날 수 있다니 그것도 운이 좋아야. 이간 뭐 동물의 왕국도 아니고 말이야. 그것에 비하면 너는 오케이 사인만 보내면 되잖아.”
“평생 9시 뉴스를 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산다고 생각해 봐. 지금부터 지루해진다.”
“더 지루할 게 있어? 네 인생은 지금도 매우 지루해. 회사 아니면 집이잖아. 여행도 싫어하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변화가 필요해. 그러나 고독사한다. 그러기 전에 결혼은 한 번은 해봐라.”
“인간은 다 지루해. 고독사할까 봐 결혼하는 건 좀 그렇잖냐?”
“사실 너의 내적 자아는 운명적인 사랑을 찾고 있어. 즉 인정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사랑이 운명적일 거라는 상상, 그것 때문에 네가 연애를 못 하는 거야. 그런 사랑은 별로 없어, 영화 속에서나 가끔 있을까? 머리가 띵하고 돌 것 같은 사랑이 있을 것 같니? 그런 건 고전 만화 ‘캔디’나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볼 수 있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래. 귓가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은 사랑만 찾다가 실버타운에서 여성 동지들과 단체여행 계획 짜다가 ‘아, 역시 사랑은 없다’라는 헛소리 말고 가까운 데서 찾아. 쉽게!”
“그러는 넌 어떤데?”
수아는 연애는 신물이 나게 하며 각종 로맨스 숏츠를 찍어대다가 계산기 두드리면서 한 중매결혼으로 성공한 모범케이스라고 소문이 동창들 사이에서 짠하게 나 있었다. 보기에도 요즘은 사회적으로 미운털이 제대로 박힌 직업군 ‘검사’를 남편으로 만나서 아직은 원만하게 잘 지내며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내 결혼? 글쎄 나중에 인생 결산을 해보면 어떨지 모르겠으나 현재 시점에서 중간결산을 해보면 그럭저럭.”
결혼정보 회사에서 가장 가장 높은 점수 군의 남자와 결혼했으면 만족도도 달라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수아의 아리송한 얼굴을 보며 생각보다 그녀의 결혼 만족 지수가 그리 높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말이야, 이건 가정인데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걸까? 랜선 연애를 하다가 결혼에 골인한 사람을 TV에서 본 적이 있거든.”
“글쎄. 내가 보기에 그들은 자본주의에는 물들지 않고 오직 사랑에만 물든 사람이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절대 안 되지. 너의 뇌의 주름이 어느 날 쫙 펴져서 순두부가 되어버리면 모를까? 어쩌면 네 안에 대책 없는 낭만이 숨겨져 있다면 가능할지도.”
“이번 생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네.”
수아와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오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메일을 겨우 열 번 받은 남자에게 내 마음을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물 새듯 조금씩 흘려도 되는 건지.
나는 그 사람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이름이 ‘다나카 야스무사’라는 것, 나처럼 한밤중에 잉베이 맘스틴의 기타 연주곡, G 선상의 아리아를 듣고, 스파게티 만드는 것이 좋고, 세상에서 스파게티를 삶아지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나와 일치한다는 정도이다. 그런 단편적인 것만으로 그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빨려드는 것은 아닌지, 키가 몇 센티인지도 모르고, 안경을 썼는지, 혈액형은 뭔지도 모르는 그런 남자, 더구나 엄마가 알면 그 자리에서 들어 누워버릴 외국인, 그것도 일본인이라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왤까?
수아 말대로 나라는 인간은 절대 그렇게 프로그래밍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인생의 한 번쯤은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고, 사랑이 뭐 자연재해도 아니잖아. 단지 호르몬이 분비로 인한 작용 아냐? 그런 생각이 뇌리를 짠하고 스치는 순간, 이미 나는 걸려들었다. 그 사랑이라는 교묘한 감정에. 그토록 부정했건만.......
꽁꽁 동여맨 내 마음을 모른 척한 한 번쯤은 풀어놔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이것은 내 감정에 대한 합리화인지도 모른다. 암튼 나는 막 시작된 달콤함에 당분간은 절여지고 싶었다. 당분 과다섭취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이메일을 기대하며 노트북을 켰다. 그의 브이로그는 삭제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왜지?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스스로 삭제한 브이로그는 더는 진입을 금지한다는 표식처럼 눈에 들어왔다. 공허한 자신을 채워줄 ‘프로작’을 이제는 필요치 않아서일까? 그래서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지 않는 것일까?
나 아는 것은 이메일 주소뿐이다. 그러나 그는 내가 보낸 이메일을 읽지 않고 있다. 더는 메일을 보낼 생각이 없다. 보내도 그가 읽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동안 나는 그가 알려준 마카로니웨스턴 스파게티만 해 먹었다.
참 색다른 느낌이다. 내가 이런 느낌을 경험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숨을 한 번도 쉬지 않고 콜라 한 캔을 원 샷 했을 때처럼 가슴이 가끔 찌릿했다. 담배를 처음 배울 때처럼 가슴을 흰 연기가 구름처럼 뭉쳐서 먹고 있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자 불공평하고 조금은 불행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왜냐하면 서른 즈음에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됐다는 것이 어이없고 스스로 용납이 되질 않았다. 오만했던 나이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한 것일까? 너무 늦게 오는 바람에 안 올 줄 알고 사랑은 개뿔이라며 남들이 보기에는 서리 맞은 수숫대처럼 처연하게 버티고 있었는데 한 번 맞은 기분이다. 그날 이후로 입에서 ‘젠장’이라는 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그야말로 젠장이었다.
출근하자마자 아침부터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는 내게 지나가던 선배가 물었다. 평소라면 도착하자마자 커피 수혈을 한 후 일을 시작하는 나였기에 선배의 눈에는 이상할 만도 했다.
“왜 그래?”
“막혔어요.”
“하수구가 막혔으면 트레펑으로 뚫고, 가슴이 막혔으면 담배 연기로 뚫으면 되지, 뭘 고민해? simple is good! 지그재그로 가지 말고 직선으로 가 산뜻하게. 그런데, 홍지수 혹시 연애해?”
“연애라는 감정이 뭘까요? 어느 정도 감정이입 되어야만 연애라고 할 수 있죠?”
나는 갑자기 예리한 시선으로 치고 들어오는 선배의 시선을 비껴가며 실없이 웃었다.
“그럼 짝사랑!?”
“선배! 이 나이에 무슨.”
“왜? 그게 얼마나 좋은데. 가장 완벽한 사랑이지. 에리히 프롬이 그랬다. 사랑은 주는 것만이 찐 사랑이라고.”
어느새 선배는 기나긴 연애학 개론을 강의할 작정인지 아예 내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IT 회사에서 프로그램디자이너로 인정받은 그녀는 마흔의 독신이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사랑의 대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화려한 연애 경력을 자랑하고 있다. 선배의 말에 의하면 사랑은 삶의 에센스이고 섹스는 존재를 위한 가장 강력한 에너지라고 했다.
“... 그러나, 내가 해본 시랑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짝꿍인 남자아이와의 새순 같던 사랑이다. 아, 정말, 둘이서 나눠 먹던 달고나는 잊지 못하지.”
흘려보낸 모든 기억은 어쩌면 추억이란 보정 필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 달고나의 추억도 사실은 틀에 직한 하트모양을 자르다가 부숴서 서로 내 탓 네 탓하며 싸웠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결국은 싸웠다. 하트모양의 가장자리를 그 애가 잘라먹다가 그만 떨어뜨려서 박살을 냈거든.
그럼 그렇지.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나의 리얼한 상상이 제대로 맞아버리는 바람에 웃고 말았다. 선배가 그런 나를 보며 사랑은 사소한 이유로 박살이 나기도 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다른 사랑은?”
“글쎄…. 세월이 흐를수록 강도는 세지고 사랑이와의 감정이 순수의 영역을 침범하니까 나중엔 내가 질리더라고, 때 빼고 광을 내봤자 거품이 꺼지고 구정물밖에 없더라고”
“좋겠네, 선배는. 거창한 이론까지 세울 수 있을 정도의 화려한 연애 경력이 있으니. 나는 지금까지 첫사랑도 제대로 안 했는데. ”
“인생을 참 다큐로 살았구나. 맨날 진정한 사랑은 없다고 울부짖지 말고 기대라는 것을 좀 해봐. 춘궁기 같은 시절이 가고 나에게도 4월 같은 사랑이 오겠지 하는.”
선배는 야유하듯 깔깔 웃으며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 춘궁기 시절을 닮은 나의 연애 춘궁기 시절을 연인 브이로그나 낯선 여행지 브이로그로 대체하는 중이다.
“그런데 서른이 넘어서 찾아오는 첫사랑인 듯 아닌 듯한 좀 구질구질하지 않아요? 왠지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머릿속의 계산기는 집어던지고 찾아오기만 하라 그래. 홍지수가 어떻게 변하는지 좀 보자. 그런데 오늘 저녁 시간 돼?”
“할 일이 태산인데 뒤엉켜서 풀리지 않네요. 선배. 뭐 좋은 일 없어요?”
“영화 ‘첨밀밀’ 표가 생겼어. 리마스터링 되어서 재개봉하는데 볼만해. 사랑을 우습게 하는 인간들이 꼭 가서 봐야 할 영화거든.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홍지수라는 인간도 그런 축에 속하지?”
“나는 사랑을 너무 경이롭게 여겨서 탈인 사람인데.”
“그런 척하는 것일 뿐 사실은 우습게 알지. 자기는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든 밤새워 편지를 써본 적이 있어? 그것이 이메일이든, 손편지든. 써놓고 보낼까 말까 고민한 적이 있냐고? 나처럼 첨밀밀 영화표를 가슴에 품고 다닌 적이 있냐고?”
“없지.”
“거봐. 그럼, 첨밀밀을 봐”
선배는 나에게 정말 가슴에 품고 다니던 영화표를 건넸다.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있던 표를 주었으니 품고 다닌 것은 맞다.
퇴근길에 나는 선배가 준 영화표를 들고 마지막 회를 보러 갔다. 오피스텔로 들어가 봤자 노트북 앞에 앉아서 이메일이나 훑고 있을 테니까.
팝콘 한 봉지와 맥주 한 컵을 사서 들어갔을 때는 막 영화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홍콩 출신의 배우 장만옥과 여명이 꿈을 찾아 홍콩에 온 상해 출신의 주인공을 연기했는데 십 년간 스치듯 사랑하다가 결국은 미국에서 만난다는 운명적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노래가 아름다워 찾아봤더니 대만 출신의 ‘등려군’이 불렀다. 두 사람은 그녀의 노래를 좋아한다. 역시 사랑은 시작은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는 갓을 영화는 말해준다.
영화 속에서 등려군이 노래한다. ‘꿈에서 본 사람이 당신이었네요. 어디선가 당신을 본 것 같아요. 당신의 미소는 봄바람 속에 피어 있는 꽃 같아요.’
둘은 돌고 돌아 두 연인은 미국의 뉴욕의 골목, 전자 대리점 앞에서 등려군 사망 소식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며 다시 기적처럼 만난다. 그런데 찾아보니 영어 제목이 ‘Comrades:Almost a Love Story’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동지들:거의 러브스토리에 가까운’이다. 뭘까? 같은 시절을 통과하고 기억을 공유하나 함께 사랑할 기회를 이런저런 이유로 주지 않다가 막판에 운명이니까 만난다는 이야기인가? 야스무사란 일본의 남자와 나는 잉위맘스틴의 기타 연주를 좋아하고, 스팅을 좋아하고, 스파게티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그야말로 ‘거의 러브스토리에 가까운’이다.
‘영화니까 가능한 거겠지. 10년 너무 길어서 지친다.’
나는 맥주가 담겼던 플라스틱 컵과 팝콘 봉지를 휴지통에 넣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텅 빈 오피스텔에 들어가기 싫어서 오랜만에 엄마를 찾아갔다. 올케가 출장을 가서 집에는 엄마와 오빠가 수박을 먹으며 한일 트로트 대전을 보고 있었다. 엄마는 나의 갑작스러운 늦은 방문에도 놀라지 않고 밥은 먹었냐고 물었다. 역시 엄마는 대인배다. 오빠는 손 한번 번쩍 들며 아는 척을 했다. 오빠는 일본 여가수의 열창에 넋이 나갔다.
“먹었지.”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마신 후 엄마와 같이 소파에 앉아서 미스터 트롯을 봤다. 그러다가 불쑥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일본사람을 어떻게 생각해?”
엄마는 입에서 우물거리던 수박씨를 손바닥에 뱉어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너, 일본인이랑 사귀냐?”
엄마의 말에 덩달아 맥주 안주로 땅콩을 먹던 오빠는 사레까지 들렸다.
“아니 두 모자가 하도 일본 여가수 노래에 빠져서 보니까 하는 소리야.”
“그럼 다행이고. 말은 통하는 사람하고 결혼을 해라. 조건은 그것뿐이다.”
“엄마도 말 안 통하는 아빠랑 결혼했잖아. 한국인끼리도 말 안 통하는 사람 많아.”
“그렇기는 하지”
오빠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순간 엄마의 매운 손이 오빠의 등짝을 후려쳤다. 오빠가 비명을 지르며 소파 한쪽으로 쓰러졌다. 그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빠가 왜 결혼해서도 엄마랑 같이 사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성별만 다를 뿐이지 둘이 너무나 닮아서 가끔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밤새도록 엄마는 집요하리만치 파고드는 엄마를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슬그머니 두 사람의 눈을 피해 일어서려는데 엄마가 나를 불러 세웠다.
“가려고? 남는 게 방인데 자고 가지?”
“내 집에 가서 자려고.”
“거기도 내 집인데?”
“고마워 그래서 월세 내잖아. 잠깐 엄마 보고 싶어서 들린 거야.”
“별일이네, 맨날 엄마를 속물처럼 보더니…. 넌 괜찮은 거니?”
“내가 뭘, 너무 지루해. 인생이 원래 이렇게 지루했나? 나한테는 왜 그 흔한 연애 사건도 없지 엄마?”
“울고불고 난리 쳐야만 진짜 사랑이냐? 은근히 스미듯, 은근하게 퍼지는 정도 사랑이야. 내가 이준이나 잡으라니까 너 뭐라고 했냐? 사랑은 없다며. 젤 걱정이 너야. 사실은 네가 제일 닮았거든.”
“그랬나?”
“응. 그러니 잘 챙겨 먹어. 그리고 틈만 나면 샛길로 빠지지 말고. 네 길은 이준이를 향해 고속도로처럼 뚫려있어. 인생 별거 없다.”
“근데 엄마 이준이란 우등고속을 탔는데 뒤에 벤츠가 오면 어쩌지?”
나는 엄마의 얼굴이 심각해지려는 것을 보고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저런 염병을 하다가 땀을 낼…. 어서, 가기나 해. 웃는 것까지 제 아비를 닮아서는. 쯧쯧쯧”
엄마는 아직도 아버지가 용서가 안 되는가 보다. 궁금하다 엄마는 아버지를 사랑했을까? 그랬으니 지금까지 줄기차게 틈만 나면 씹은 것 아닐까? 다른 여자에게 갈 용기도 없었던 아빠의 비겁한 사랑보다는 애증이 범벅인 된, 뒤끝 질긴 엄마의 사랑 앞에서 겸허해진다.
“데려다 주랴?”
“뭘 됐어. 걸어서 10분이면 가는데. 저 가요”
자식들 뒤에서 언제나 장승처럼 든든하게 버티어주는 엄마가 아니었다면 나른하다고 투덜거리는 오늘의 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울컥했다.
엄마는 결국 고집스럽게 내가 사는 오피스텔 건널목 앞까지만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나는 동안 엄마가 사라진 골목을 지켜보다 건널목을 건넜다.
교토의 야스무사에게는 나와 같은 가족이 있을까? 왠지 그에게는 천정까지 닿을 것 같은 노란 미모사만이 그의 유일한 가족인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교토에 한번 가볼까?’
나는 오피스텔의 비번을 누르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