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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연애에 물들다

연애에 스며들다, 교토 2

by Dear Lesileyuki Feb 27. 2025

새벽 두 시의 거리에 그와 닮았을 것 같은 달빛이 쏟아지고 있다. 나는 생각에 잠긴 채 한동안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일주일째 연락도 없는 야스무사라는 남자에게로 향하는 나의 호기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갑자기 가슴 한구석에서 그리움 같은 것이 스멀거리면서 피어 올라왔다.

핸드폰으로 그가 마지막으로 보낸 이메일을 확인했다.      

나의 프로작에게 

나는 잘 있습니다. 지금 나의 거실에는 활짝 핀 노란 미모사 꽃들이 떨어져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밟지 않으려고 살살 피해서 다닙니다. 꿈이 부서져 버릴까 봐.

아, 오늘은 프로작을 한 알 먹었습니다. 잠깐 기분이 좋았습니다. 당신 덕분에 요즘은 프로작 한 알 정도면 하루를 보냅니다. 어떤 날은 이틀씩이나 갑니다. 그럴 땐 도서관에 갑니다. 자전거를 타고 벚꽃이 흩날리는 언덕을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올라갑니다. 가끔은 가모 강으로 산책하러 가기도 합니다. 오직 산책 외에는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온종일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오늘은 오전 내내 실비가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비의 커튼 사이로 머지않아 꽃을 피울 수국의 초록빛 잎새가 바람에 수줍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프레베르의 <바르바라>를 암송합니다. ‘오 바르바라 지금도 기억하니 그날 브레스트에는 비가 쉼 없이 내렸지. 그리고 너는 걸었지, 웃으며. 환하게 희열에 차서 흘러내리는 비를 맞으며….’

나는 ‘행복한 너의 얼굴에, 행복한 이 도시에 내리던 현명하고 행복한 비를’을 암송할 때 기분이 좋습니다. 교토에 사는 나를 위한 구절인 것 같아서입니다. 비가 내리는 교토는 꽃이 질 때만큼 아름답고 우아합니다. 나의 정원 한쪽에 자리한 대나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미안합니다. 조만간 혼자서 여행을 떠나게 될 것 같습니다. 

그의 마지막 메일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불문학을 배운 적이 있거나 아니면 전공했을 거라는 것이다. 프레베르의 시를 찾다 보니 그의 시를 노래로 부른 가수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 가수는 이브 몽탕이었다. 나는 일부러 그가 부른 노래, 바르바라를 찾아서 들었다. 그리고 상상했다. 그의 집 창가에는 대나무가 자라고 있고, 동네 어귀에는 벚꽃이 흩날리고, 이어폰을 낀 그가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까만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바람에 흰 셔츠를 부풀리며 언덕길을 달려내 갈 것이라고. 그가 듣고 있을 노래는 당연히 ‘바르바라’ 일 것이다.

터무니없는 순정만화 같은 나의 상상력에 그만 실소를 짓고 말았다. 

밤새 뒤척인 덕분에 머리가 띵했다. 미친 듯이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에 더 머리가 아팠다. 분명 이준이다. 인간 모닝콜이라고 떠들어 대며 아침부터 전화를 거는 사람은 그뿐이다. 그의 핸드폰 벨 소리가 나의 아침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바람에 전화를 받았다.

“늦잠 잤니?”

“미친놈아 왜?”

“보고 할 게 생겨서.”

“지랄, 내가 상사냐? 관심 없어.”

“아냐 있을걸? 내가 법학 대학원을 가기로 했다.”

“시인 되신다며?”

“엄마가 그러는데 시인 남편보다 법조인 남편이 더 나을 것 같아서. 내가 용기는 부족하지만, 공부는 좀 했잖아”

“지랄도 풍년이다. 맘대로 해!”

“엄마가 로스쿨 다니고 너랑 결혼하면, 집 내 명의로 해준단다. 우리 1가구 2주택이잖아.”

“내 인생에서 널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을지 참으로 난감하다. 하긴 이 나라 문단을 위해 큰 결단 한 거다. 그럼 전화 끊는다.”

“아직 하나 더 있어. 경고 하나 하려고. 변신은 무죄지만 변심은 죄악이다. 이상한 냄새 나는데, 절대 내 밥그릇은 안 뺏긴다. 내가 예전의 이준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

“왜, 도시락 폭탄이라도 던지려고?”

“어, 교토에 던질지도 몰라”

“너, 혹시 우리 집에 CCTV 설치했냐?”

나는 오피스텔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너 맘속에 CCTV 설치했으니까 조심해”

핸드폰 저 너머에서 웃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극강의 용기까지 장착한 오래된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 이준은 요즘 뻔뻔스럽기가 3중 스테인리스 수준이다. 누가 그를 여자 짝꿍에게 연필로 똥침을 넣고 겁에 질려 울부짖던 그때의 남자애라고 믿을 수 있을까? 그는 이미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로 변해 있었고 나의 카톡 프로필 배경 사진만으로 나의 마음과 심리를 파악하는 예리한 여우남으로 변해 있었다. 이러다가 교토행 비행기까지 같이 타는 거 아닌지 걱정된다.

이준에게서 다시 카톡이 왔다. 

‘유연천리래상화, 무연대면불상본’ 즉 인연이 있다면 천 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만나지만, 인연이 없으면 얼굴을 마주하고 살지라도 만나지 못한다.

이준이 나에게 한 방을 먹이는 걸까?

그런 와중에 이준이 또 다시 카톡에 시를 날렸다. 

‘버스 정류장 옆에 해파라기가 피었네. 내 마음에는 너라는 꽃이 활짝 피었어. 나의 모든 것을 너의 마음에 맡겨두었으니 열어봐. 비번은 너의 생일’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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