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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일기

by 수호


대체 공휴일이 끝나간다. 사실 나와는 별 상관 없는 날이다. 난 주말이든 평일이든 별 타격 없으니까. 좋게 말하면 프리랜서, 나쁘게 말하면 백수.


설을 맞아 본가에 내려갔다. 평화로운 시내, 여전히 사람이 적은 지방이었다. 설에는 그래도 사람들이 좀 모이는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고 밥을 먹고 피시방에 갔다.


간호사인 친구가 있는 탓에 10시에 헤어졌다. 나이트 근무란다. 그렇게 한적한 동네에서 운전을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가는 길엔 차가 더 적었다. 그래도 안동이 13만 인구라고 했던 것 같은데 다들 어디서 지내는 걸까.


1월은 진짜 정신 없었다. 단편영화 만든다고 돈도 정신도 체력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정신없이 달리니까 끝났다. 사실 끝나진 않았다. 후반 작업이 남았으니까. 그래도 뭐, 내가 직접적으로 힘드는 건 아니다. 그냥 내 통장이 힘들 일만 남았다.


단편영화가 끝나면 한 명씩 연락을 돌린다. 배우부터 스태프까지 합치면 20명은 족히 넘기 때문에 한 명씩 연락하는 것도 일이다. 단톡방에 남기면 너무 정 없어 보여서 갠톡으로 남기고 배우들에겐 전화를 직접한다.


사실 스태프 쪽은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조별과제에서도 발표하는 게 마음 편했다. 피피티 만들고 자료조사 이런 건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남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발표하고 싶었다.


그래도 내가 나름 못하지만은 않은 탓인지 다음 일도 제의가 들어왔다. 사실 좋은 건진 잘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래퍼의 뮤비니까 좋긴 한데, 그 촬영의 과정을 또 겪고 싶진 않다. 사실 모르겠다. 2월까진 일단 그래도 다 해보고 싶은 마음이긴 하다. 3월엔 입학이니까.


대학원에 입학하는 기분은 사실 잘 모르겠다. 대학교 다시 들어가는 기분은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한 것도 없고. 그냥, 그렇다. 학교 인터뷰가 들어왔다. 인터뷰라고 해도 비대면으로 파일만 주고 받는 거였다. 한글 파일 속엔 질문들이 6개가 있었고 난 거기에 답변을 적었다. 그렇게 학교 공식 인스타 계정에 올라오는 듯했다. 다른 인터뷰어들을 보니 재학생들이었고 학번이 2로 시작했다. 난 18인데. 심지어 재학생이 아닌 졸업생인데.


여러 인터뷰어가 있었다. 청춘이라는 파도 위를 서핑하는 서퍼 2X학번 공대 000. 청춘을 연기하는 2X학번 000. 쭉 보자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재학생 때는 아무 연락도 없었는데. 그리고 인터뷰 대상자들을 보니 다들 뭔가 화려했다. 나는 어떤 포폴이 있을까 생각했다.


나를 소개하는 한 마디를 생각했다. 나는 배우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냥, 배우라는 말은 여전히 부담된다. 그렇다고 뭐 다른 말도 그렇다. 내가 그렇게 뛰어난가? 사실 그건 아닌 것 같고. 사람들에게 각인된 작품이 있는가? 그것도 아니고. 이번 <스터디그룹>에서도 실감했다. 영상 속에 내가 잘 나오길 바라진 않았지만 크레딧에도 없는 내 이름에 적잖이 충격 받았다. 나를 캐스팅했던 캐디의 이름 또한 크레딧에 없었다. 뭘까.


크레딧.


옛날엔 크레딧을 넘겼었다. 크레딧에 있는 이름이 궁금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크레딧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작품 하나를 위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투여되고 노력한다는 걸.


<스터디그룹>에서 뵀던 173위 역 배우를 어떤 영화에서 만났다. 사실 그땐 돈이 떨어져서 보조출연을 갔던 거였다. 그래서 부끄러웠다. 계속 올라가서 같은 위치에서 만나고 싶었는데.


단편영화 촬영이 끝나고 외장하드를 들고 편집감독 댁에 갔다.

편집감독은 영화에 대한 신념이 뚜렷해 보였다. 영화, 촬감 형 또한 그랬다. 영화에 진심이었다. 영화를 좋아하기에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걸 테고.


나는 그 정도일까? 모르겠다. 편집감독이 내게 물었던 게 있다.

거울샷 영상을 보는 중이었다. 내게 왜 찍었냐고 물었다.


나는 예뻐서라고 대답했다.


편집감독은 웃었다. 거울은 인물의 내면을 비춰주는 중요한 오브제라고.


어렵다. 사실 촬영을 하면 욕심이 많이 생기고 무례해졌다. 학교 대강당에서 허락을 맡지 않고 찍다 수위아저씨한테 혼나기도 했다. 촬영이 끝나고 수위아저씨께 사과하러 갔다.


옛날에 마스크걸 촬영팀이었나. 쓰레기를 무단으로 버리고 튀었다는 뉴스를 봤던 것 같다. 촬영팀은 왜 저렇게 무례할까, 생각했었는데 내가 그렇게 되고 있었다.


세상은 역시 어렵다. 사람은 모르겠고.


인생은 한 번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어딨겠는가. 그냥 다들 미생이니까 불안하고 걱정하면서 살아가는 걸 텐데. 그래도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아가고 싶단 욕심이 자꾸만 생긴다. 나는 아마 이 사회엔 적합하지 않은 인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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