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일기

의식의 흐름 주의

by 수호

본선에 진출해 에세이 토론을 했다. 이해가 안 됐다. 에세이를 쓰는데 토론까지 하는 이유는 뭘까. 토론팀이 없으면 몰라.

뭐라고 해야 할까.. 평화적이지 않은 건 싫다. 토론은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데 존중과 배려가 없으면 그건 토론이 아니라 말싸움에 불과한 거 같다. 물론 본선이 그랬다는 건 아니다.

난 싸움이 싫다. 포뇨한테도 화 한 번 내지 않았다. 모르겠다. 정확히는 화를 낸 적이 없진 않을 것 같지만, 최소한 언성을 높이며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진 않았다. 토론을 맞서 준비하는 건 당연히 싫었다. 난 J가 0이 나올 만큼의 무계획형 인간이다. 에세이 자체도 제출 1시간 전에 한글을 띄어서 30분 동안 써서 맞춤법 검사기를 돌리고 냈다. 아무 기대 없었는데 본선 연락이 왔던 거였다. 8명이 결선에 진출하는 거였는데 우린 9명, 며칠 지나니 8명, 본선 시작하니 7명이었다.

누가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누가에 내가 해당했다. 6명만 진출한다고 말 바꾼 거다. 사실 대회에 대해서 여러가지 불만은 소통이다. 유동적으로 바꿀 수는 있지만, 대회측도 알 것이다. 자기네들끼리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있음을. 들어가라 해서 들어갔더니 나가라고 하는 등, 행정과 진행의 의사소통은 맞지 않았다. 줌의 한계일 수도 있다.

싸움이 싫었고 준비도 하기 싫었고 떨어진 것에 불만은 없다. 사실 가고 싶지도 않았다. 일정도 맞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 참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준비할 때, 평화롭게 하고 싶었다. 필리핀을 갔다 왔다고 하길래 그 일화를 물었다. 평화 주제로 에세이를 쓰고 얘기를 나누는데 굳이 우리끼리 싸워야 할까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꼬투리를 무는 사람이 나왔다. 선입견을 운운하기까지 했다. 앞뒤 문맥 다 자르고 문장 하나만 갖고 꼬투리를 무는 걸 보고 어이가 없었다. 그 사람의 성격이나 악의가 없을 순 있지만 말투도 거슬린 건 사실이다. 공격적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싸우긴 싫었다. 나도 그냥 자포자기하고, 나도 따지듯 물으려다 참았다. 투견이 아니니까.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다. 어젠 북뿜뿜 2회차였고 거기도 토론을 했다. 대면이어서 그런지 오해는 쌓이지 않았다. 5명 중 두 명의 토론이 조금 열띤 거 같았지만 학번이 있어서 그런지 차분했다. 다행히 기분 나빠 보이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나의 성격 탓인지 어느 쪽 편에 입장을 밝히고 싶지 않다. 한 쪽의 손을 들어주는 거 같으니까. 어느 쪽으로든 규정되고 싶지도 않고.

후.. 처음엔 나한테 따지듯 묻는 상대에게 기분이 나빴다. 벌써 시간이 꽤나 지났고 사실은 별거 아닌 일이었다. 그냥 최선을 다하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싶기도 했으니까. 최선., 뭐 어쨌든 노력이니까. 만약 내가 결선에 갔었어도 솔직히 얼굴 보기 민망했을 것 같다. 모르는 사람과 캠프를 하고 그런 건 영,, 내 취향이 아니다. DMZ는 한번 가보고 싶긴 했지만, 뭐 나중에 직접 가보지 뭐.

대회명은 2022 평창평화챌린지 토론.에세이 대회였다. 사실은 평창인지 평양일지 우스갯소리로 친구와 얘기해보기도 했다. 나만 그런 생각한 게 아닌지 본선 중에서 "평양, 아니 평창"이라고 말실수한 사람이 있었다. 심사위원 중 하나는 전 여가부 장관이었다고 하고.

어떤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게 아니다. 그냥 적당한 선을 생각했다. 그 선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니 참 애매하다. 에세이라니도 이번 달까지 참여하기로 했는데, 4편 더 쓰면 끝이라고 생각하니 아쉽다. 2학기엔 연극에 참여하기로 한 탓에 일정이 바빠진다. 유튜브 촬영을 하고 온 일요일엔 멘탈이 흔들렸다. 감독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게 보였으니까. 내가 이때까지 배우고 준비한 연기랑 결이 너무 다른 게 유튜브 생태계였던 거 같다. 빠르고 정확한데 꽁트까지. 어려웠다. 감독이 요구하는 걸 하려면 나의 100%를 쏟았으면 가능했을 거다. 근데 그러면 너무 눈에 틔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런 잡생각보단 일단 질렀어야 했다. NG를 무서워하면 안 되는데, 나 때문에 지연되는 느낌이 나면 그게 너무 힘들다. 나 하나로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게 보이는 거 같다. 결국 OK가 아닌 됐어요, 가 감독의 입에서 나왔다. 나도 만족 못 했는데 감독은 오죽할까. 작품 전체를 생각해서 조화롭게, 이건 내가 고려할 요소가 아니었다. 내가 80으로 연기를 했다면 감독이 원하는 건 90이었고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80과 100,, 결국 내 부족이었다.

촬영이 끝나고 고기를 먹으면서 감독이 얘기했다. 미팅 때 보여준 게 안 나왔다고. 그러곤 감독은 내게 간절함을 운운했다. 사실 그 간절함을 들먹일 정도일까 싶었는데 그게 사실일 수도 있었다. 영상이 올라오면 알겠지만 어쨌든 내 부족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어떻게 보면 위에서 말한 토론도 내 부족일지 모른다. 결국 싸우기 싫다는 건 변명일지도 모르니까. 나는 SDGs도 인종주의종식과 세계평화 구축에 관심이 없으니까. 주변에 차별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이들을 먼저 해결하면 자연스럽게 세계평화로 나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만 가졌다. 그걸 토대로 에세이를 썼고 접근했다.

자본주의가 잘못됐다고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회주의가 답은 아니다. 우리는 뾰족한 해결책을 내밀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순응하는 게 정답이 아닌 것도 안다. 불가능한 방안도 일단 얘기를 꺼내보는 것, 그런 노력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거였다. 처음에 구리하라 야츠시의 <학생에게 임금을>을 읽었을 땐 당황했다. 친구는 이 책을 보고 불온서적이라고 했다. 작가가 말하는 해결책은 (일본일지언정) 불가능해보였으니까. 18년도 당시 시간 강사에게 위 책을 물어봤다. 나온 대답은 위에서 말한 거였다. 무엇이라도 찾으려는 노력 그 자체에 의의가 있다고. 맞는 말이었다.

뭐라도 노력해야지. 밀린 운전면허를 이번 달엔 무조건 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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