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4

by 수호

브런치북을 위해서 브런치에 가입했다. 네 번만에 된 거 같다. 처음엔 이게 뭐지 싶었다. 난 계획이라곤 정말 짜기 싫어하는 사람인데, 뭘 목차를 짜래. 어쨌든 하라니까 했다.


아직 다른 사람의 글을 안 읽어봤지만 메인에 올라오는 작품들은 훌륭해보였다. 좋은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보기에 좋은 글인 것도 맞았다. 그림이 있고 사진이 있고 정렬되어 있고. 내 글은 그것들에 비해서 나은 게 뭐지. 생각이 들자 메리트가 없었다.


<쇼미더머니>를 보고 있다. 내가 유일하게 보는 프로그램이다. 원래 랩을 좋아하다보니 관심 가지게 된 것도 있지만 정확히는 쇼미로 힙합에 입문한 거고. 뭐 아무도 안 궁금할 테니까 어쨌든 노래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어쨌든 이런 프로그램의 장점은 많은 사람들이 알려진다는 거다. 좋든 나쁘든. 나는 내가 모르는 래퍼를 보면 신이 난다. 찾아보게 된다. 언제였더라 미란이가 처음 나왔을 때 방송이 끝나자마자 유튜브를 검색하고 사클을 뒤졌다. 작년이었나 그땐 폴로다레드를 바로 들어봤다.


힙합 얘기를 꺼낸 건 이찬혁을 위한 빌드업이다. 여러 포퍼먼스를 보여주는 악동뮤지션의 이찬혁. 난 솔직히 멋있다고 생각한다. SNS의 댓글을 보면 그렇지 않은 반응도 보이던데, 원래 새로운 시도는 항상 반발이 따른다. 저스디스의 가사에서처럼 '새로운 걸 하면 구리다 하고 익숙한 걸 하면 빼겼다 하고'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2000년이 넘도록 지속된 아리스토텔레스적 연극을 깬 사람이다. 당시 어떤 반발을 샀을지 상상이 됐을까. 2000년이나 굳혀진 희곡을 탈피한 서사극의 창시를, 글로 배우는 우리에겐 실감나질 않을 거다. 항상 그랬던 거 같다. 새로움엔 항상 부정적인 시선이 따른다. 이찬혁의 행동은 예술에 가깝다고 포장할지 진짜 예술일지 사실 그건 두고봐야 알 수 있는 거다. 난 장기하가 멋있는 점은 꾸준히 자신의 개성을 살린다는 거. 박상영 작가의 작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난 예술가라면,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장기하에게 배울 자세가 있다고 생각한다.


옳지 않다고 말해도 굳게 밀고 나가는 자세. 사실 옳지 않다고 말하는 거에 있어서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선입견이니까. 편견을 깼을 때 새로운 게 나온다.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으로서 새로운 글에 인상이 찌푸러질 때가 많다. 물론 그것의 8할은 기본이 안 되어있기 때문이다. 난 축구에 있어서 기본은 패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드리블도 안 되는 애가 개인기를 배운다고 그러면 꼴불견 아닌가. 농구를 배우는 애가 <슬램덩크> 탓인지 덩크부터 한다면 그게 마땅한 일인가.


글에 있어서 기본은 묘사라고 생각한다. 시에 있어선 이미지고. 이미지와 묘사는 사실 같은 뉘앙스로 봐도 무관하다. 굳이 나누고 싶진 않다. 자꾸만 새로운 용어를 만들고 하는 이유는 소속감 때문일지 전문가처럼 보이고 싶은 위선일지, 나는 철학도 쉽게 풀어내고 싶다. 하지만 철학에 있어선 항상 조심스럽다. 쉽게 풀어낸다는 건 결국 철학자가 한 게 아닌 번역한 사람 혹은 인용한 사람 혹은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들어가니까. 그렇다면 그건 철학자의 철학이 아닌 게 된다.


항상 어렵다. 중간은 애매하고 위치도 모르겠고. 어디에 손을 들지도 모르겠고. 왼손 오른손 반만 들고 다닐 수도 없고. 그럼에도 철학은 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꾸만 어려운 용어로 포장하지 않았으면 한다. 문학에 있어서도 굳이 이런 용어를 쓰는 이유를 모를 때가 많았다. 아마 어쨌든 문학의 커리큐럼은 외국에서 왔기 때문일지 모른다. 시에서 숱하게 배운 객관적상관물이나 감정이입이나 외국 거니까. 엘리엇이 했던 건지 에즈라 파운드인지 솔직히 햇갈리는데, 그건 중요하지 않다. 우리나라에 그 개념이 없었던 거지 안 쓰인 건 아니니까. 백석이 에즈라 파운드(혹은 엘리엇)의 시와 학문적 성과를 보고 시를 썼나?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사실 안 찾아봐서 모르겠지만 아니지 않을까.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에서 나오는 마지막 그 고매한 '갈매나무'는 객관적상관물의 대표 예시인데


옛날 유리왕이 지었던 <황조가>에 꾀꼬리는 감정이입 혹은 객관적상관물인데 고구려 시대에도 있던 그 개념. 사실 근데 이렇게 뭔가를 지칭하고 용어를 만드는 게 좋은가? 묻는다면 난 잘 모르겠다. 명명한다는 건 김춘수의 <꽃>처럼 긍정적 불림으로써 기능만을 하지 않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가 이름을 불러주자 '꽃'이 되었다는 그 긍정적 효과로써의 불림이자 명명. 존재론적 성찰이 드러나는 그 시인의 시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대표되는 게 '게이'다. 물론 이 뜻은 변했다. 비하하는 말로 쓰였던 게이라는 단어는 훗날 퀴어 자신들의 정체성의 상징이 되는, 의미를 받아들이고 뜻을 변화시킨 대표적인 단어다. 이것을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에서 읽었는데 솔직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 대학 왜 다녔지.


<쇼미> 1화를 보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방송에 나온다는 거에 있어 긍정적 효과와 부정적 효과는 분명했다. 결국 이영지는 인기를 많이 받을 거다. 비와이 때보다 심한 현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의 실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음악하는 사람은 음악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방송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음악하는 사람이 방송을 나오겠지. 던말릭도 그 사람 중 하나겠고.


난 <유명한 아이>라는 래퍼를 오래 전부터 봤다. 옛날 그렉케이였었나 이름일 때부터. 딩고 프리스타일에 그가 나오고 한요한의 피처링을 받은 노래가 유튜브에 올라왔을 때 실로 놀랐다. <드랍더비트>에서 결승에 오르고 하면서 인스타 팔로우도 많이 늘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언더인 사람을 좋아해본 건 처음인 거 같다. 어쨌든 내가 알게된 래퍼는 어딘가에 비친 래퍼들이었으니까. 물론 과하게 랩을 좋아하는 탓에 언더도 조금은 아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방송에서 보여지는 음악이 그 사람을 좌우할까, 그게 아쉬울 뿐이다. 던말릭이 쇼미에서 싱잉을 한다면 느낌이 이상할 거 같다. 그가 이때까지 보여준 행보에서 결국 유행을 따라간 게 되니까. 유행이라고 말하면 좀 그런가. 모르겠다. 이런 글은 반박을 받기 쉬우니 이제 그만해야겠다.

keyword
이전 27화밀린 일기를 쓰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