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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손잡고

대회에 출고했던 에세이

by 수호

“인종 차별할 사람은 제가 어떤 인종이든 차별했을 거예요.” 유퀴즈 방송에 조나단이 나와서 한 말이다. 조나단은 이어서 “어쨌든 인종 차별은 모든 인종이 차별주의자와 싸워야 하는 거지 서로 그럴 문제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즉, 인종끼리가 아닌 차별주의들과 싸워야 할 것이 인종 차별이라는 얘기가 된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름을 용서하지 않을 때가 있다. 사실 용서의 개념보다는 부러움이나 질타일지 모른다.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선망과 부러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으니까. 세상은 알게 모르게 작은 싸움의 연속으로 이뤄져 있다.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기독교와 한 뿌리로 두지 않으며 이슬람교에선 테러리스트들이 자신들 종교적 명목하에 활동한다. 서울이라고 다를까. 여러 시위와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은 언제나 이질적이다.

인종주의란 이 많은 싸움에서 비롯된 하나의 결과물이다. 사실 결과물보다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지금의 사회가 잘못된 것을 알지만, 고칠 방법을 모른다. 사회와 교육의 문제를 언제나 일관되게 뽑지만 정작 자기네들이 그 나이가 되었을 때 현 대한민국이 바뀌었든가. 인종주의는 우리의 안일한 태도와 시선에서 방관 된 결과라는 거다. 인종주의 종식이 오면 자연스레 평화구축은 이루어질 것이고.

평창에서 열린 올림픽은 여러 의의가 있다. 단순히 한국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솔직히 젊은 세대 중에 북학에 대해서, 통일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싶다. 그럼에도 이번 평창 올림픽은 남북 화합을 증명했다. 분단국가임에도 국민들이 불안에 떠는가. 아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전쟁이란 멀지 않은 것임을 증명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타격을 입지 않는다. 어제와 같이 출근했고 내일도 오늘과 같이 출근할 거다. 뉴스에서 들리는 안타까운 소식을 보고 고개를 젓고 혀를 차고 할 뿐, 어제와 바뀐 것은 뉴스 내용밖에 없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서로서로 도울 때라고 생각한다. 약자가 약자를 돕는 세상 말이다. 부족한 점과 못난 점을 부각하지 말고 그것을 서로 메우고 협력하는 순간은 우리 사회에서 찾기 힘든 점이다. 특히 이번에 인기를 끌고 있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면 더 실감할 수 있다. 우영우의 장애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우영우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 사랑스러움이 특화됐음을 말이다. 평범한 사람과 동일하다는 시선이 기존 드라마에서 쉽게 다루지 못한 장애인을 소재로 흥행에 성공한 거다.

지하철 시위로 말이 많았던 전국장애인연합회를, 코로나 시국을 통해 만들어진 게이에 대한 부정적 시선 등 우리는 사실 숱하게 차별을 보았고 차이를 뒀다. 그리고 소수자의 행위에 대해서 부정적 결과가 배출되면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물론 부정적 시선에 대해서 반감을 품는 것은 아니다. 맞는 말도 있고 아닌 말도 있으니까. 단지 안타까운 것은 약자가 약자를 사냥한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소시민들의 투쟁, 딱 그런 느낌이다. 사실 싸우는 우리들은 모두 소시민이니까. 대한민국 부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상위 10%가 인터넷 기사에 댓글을 달며 싸우진 않을 거 아닌가.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정작 부자들은 조세 대피처 등을 찾아다니며 탈세하기 바쁜 중에 우리는 우리끼리 칼을 겨눈다. 누가 옳고 그름을 우리끼리 재단한다. 약자가 약자를 돕는 세상이 아닌 약자가 약자를 위협하는 세상이란 말이다. 인종주의 종식을 위해선 이 기본적인 차별에 대한 이해가 절실하다.

백인이 우월한가. 흑인은 부족한가. 황인은 그럼 어떨까. 대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학생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대중에게 밝히기를 꺼린다. 특히 쟁점적일수록. 그중 하나는 인종이다. 젠더, 정치도 마찬가지다. 인종주의 종식 전에 가장 필요한 건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인데, 그것을 지속시키기엔 우리나라 교육은 너무나도 다수를 옹호한다. 무리에서 눈에 띄는 사람은 배척된다.

학원에서 일하면서 질문하는 아이들은 손에 꼽는다. 특히 집에 가는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말이다. 대학교라고 다를까. 수업이 끝나고 질문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따로 남아서 묻는 경우는 있어도 말이다. 그렇기에 다름의 범주에 속하는 소수자는 차별에 쉽게 노출된다. 백인 사회에 들어간 흑인처럼 말이다. 특히 약육강식이 성행하던 시기에 흑인 노예는 하릴없다. 노예란 개념엔 사람이 속하지 않았으니까. 물건엔 차별이란 건 없었다. 흑인 여성 노예를 강간했던 백인 남성을 논지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당시 백인 남성에겐 강간이라는 개념을 들먹일 수 없다. 노예는 앞서 말했던 동산일 뿐이다.

재산이었던 노예를 어떻게 쓰는가는 자유다. 그게 몇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은 당연히 문제 되는 거다. 인종주의 종식은 평화로운 세계를 위해선 우선시되어야 하고 말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조나단을 떠올려보자. 조나단은 암살 개그로도 유명한데, 그것은 자신의 까만 피부를 이용해 웃음을 자아내는 거다. 그렇다면 조나단 스스로 까만 피부를 언급해도 되지만 우리는 왜 그러면 안 될까. 정확히 안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기분 나쁘다면 당연히 피해야 하는 거다. 우리가 이유 없이 사람을 때리면 용서받을 수 없듯, 그 사람에게 폭행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 조심성을 가지자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반감을 품는 것처럼 흑인은 백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 사실 이것을 언제까지, 라고 적용하고 법률화할 순 없다. 누군가는 세월호에 대해서 우려먹기라고 욕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하나다. 사람이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할 자격은 없다. 우리는 자유로울 권리가 있고 의무가 있는 자유 시민이니까.

학원에서 클리닉을 할 때면 항상 아쉬운 점이 있다. 학생들이 더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일방적인 주입식 강의를 멈췄으면 좋겠다. 사교육에 돈을 퍼붓기보단 학생 개개인의 자아실현을 위해 돈이 투자되었으면 좋겠다. 내 바람은 소박하지만 이뤄지긴 어렵다. 사교육에 임하는 내가 할 소리가 아니라 여기는 까닭도 있지만 인식에 문제도 있다. 사실 어느 부모가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르겠는가. 성적이 인생에서 다가 아니지만, 그게 인생에서 좌우하는 게 크다는 걸 부모는 아니까 그러는 거다. 아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학업이 아닌 그것을 시키겠지. 하지만 부모도 아이도 이것이 내 평생의 일이 되어야만 한다고 장담을 못 한다.

좋은 교육 환경을 통해서 자라난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이 세계 평화에 가담하지 못 할지도 모른다. 항상 악재를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교육에 문제점을 찾아서 바꿔야 한다. 나아가 커뮤니티의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 많은 커뮤니티 사이트는 사실 비효율적이다. 정확히는 청소년의 인식 확립에 있어선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많은 사람의 갈등은 대면보단 비대면으로 이뤄지고 인터넷에서 싸움을 극도로 활발하지만 실제 현장에서의 싸움은 적다. 홍대 거리에서 싸움을 찾는 것보다 네이버 기사 댓글을 보는 게 훨씬 갈등을 빠르게 목격할 수 있다.

그런데 올림픽 기간만큼은 그 열띤 싸움이 멈추는 것을 볼 수 있다. 평창 올림픽 때 내가 목격한 모습은 선플이었다. 금메달을 향한 함성과 은메달에 대한 기쁨과 동메달에 대한 응원을 봤다. 사람들이 한뜻 한마음이 되어 봉사했고 평창을 아름답게 빛냈기에 대한민국의 올림픽이 성공했다. 동계 스포츠 종목에 사람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가졌고 컬링처럼 이슈가 되는 종목도 있었다. 4년에 한 번의 관심을 받던 선수들에 응원과 함성을 사람들이 질러주었다.

이미 교육으로 커버할 수 있는 나이를 대다수의 국민들은 지났다. 그렇기에 매체의 힘이 중요하다. 올림픽처럼 드라마처럼 말이다. 앞서 언급한 우영우를 통해 사람들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이 가능하다. 이데올로기란 원래 이렇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신화를 듣는 이유는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무대를 연단으로 썼고 나치의 히틀러도 연극을 통해 국민 개선을 했다고 한다.

4년에 한 번인 올림픽은 평화로 국민들을 한뜻으로 다잡았고 앞으로도 우영우와 같은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직접적일수록 사람들은 반감을 품는다. 코끼리를 상상하지 마, 라고 말하는 건 처음부터 모순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매체를 통해 꾸준하게 사람들의 인식 개선을 교육하고 사람들에게 질 좋은 교육과 환경을 제공할수록 차별에 대한 폭은 줄어들 것이다.

소수자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것은 어려워도 그들이 사람이라는 것에 부정할 사람들은 없으니까 말이다. 한 계단씩 천천히 밟다 보면 언젠가 나아진 사회가 완성될 것이다. 그럴 때면 조나단과 같은 친구가 방송에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색깔로 사람을 나누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대우하고 차별받지 않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소수자에 대한 인식 개선에서 이뤄져야 한다. 약자들끼리 싸우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아무렇게나 길바닥에 버린 담배꽁초 하나가 그곳을 흡연구역으로 만들 듯 말이다.

다음 세대에는 더 나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많은 대학생은 얘기했을 것이다. 대학에선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과 어울리는 공간이기에 거기에서 어울리지 못했던 것이 안타깝다고. MT도 동아리도 말이다. 나 또한 코시국 학생들에게 그것이 가장 안타까울 뿐이다.

사람은 겪어본 것에 대해 공감을 더 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사람을 차별받지 말아야 할 이유를 몸소 느끼게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짐작할 수 있는 지능을 갖춘 지성인이 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다. 우리는 우리일 때 가장 아름답다. 사람은 사람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으로서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뜻이다.

내가 가장 아름다웠을 땐 오늘이고 내일이 되면 다시 오늘이 올 건데, 더 늙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자. 나부터 용기 내 차별을 방지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동조한다면 인종주의 종식은 머지않은 미래다. 세계 평화구축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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