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될 때면 그 근원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는 때가 있는 데,
나 또한 그런 일을 수 십 년 반복해 왔지만 원인을 알아차리는 순간은,
대게는 어떤 우연이나 얼핏 떠오르는 기억에서 더듬어 잡아지는 찰나인 듯하다.
그날 새벽, 나는 종종 있는 일로 새벽에 잠에서 깨였지만,
여느 때와는 다르게 보이는 창문 밖을 왠지 모르게 꽤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고정된 프레임 속에 갇힌 어둠의 틀을 조용하게 유지하며 시간의 흐름이 멈춰지는 그 순간에,
달의 고단함이 깊어지는 듯한 환영에 어우러져 달을 바라보았다.
그를 보며 빌고 빈 저마다의 소원들과, 띄워 보낸 꿈들, 그윽한 그리움들, 고통을 멈추고 싶은 간절한 기도들이 존재하고, 그렇게 달은 태초부터 이 세상에 자리했던 수많은 염원의 부담을 끌어안는다.
그래서 달은 밀물과 썰물을 일으켜 그것들을 파도에 밀어버리고 쓸어버리는 것이리라.
미처 쓸어내지 못하는 고단함으로 지쳐가는 생의 자락에서 잠시 멈춰 섰던 그 시간,
나는 마침내 내 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던 그 '눈동자'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30여 년 간 눈앞의 지독한 생에서 탈출하고픈 나의 욕망에 발목을 걸고, 실패의 변명거리가 되어 주기도 했던 것이 그 눈동자였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 속에서 단 한 발도 나아오지 못했던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입 안이 뜨거운 숨으로 씁쓸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여태 남아있던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에 대한 안도감은, 나의 생에 해결의 실마리와 앞으로의 과제를 부여하는 듯했다.
초경이 시작되던 열네 살 여름날의 끝자락을, 시간의 한 톨, 한 줌까지도 기억한다.
엄마가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수 십 알의 약을 삼켜 넣었던 그 새벽녘.
어린 나의 전신에 휘감겨 오는 무거운 졸음과 뜨겁게 돋아 나는 피로감.
언니가 허물처럼 켜켜이 붙들려 흔들어 대어도 그저 축 늘어져 있던 화장실 문짝의 쇠문 고리.
콧물과 눈물로 짓이겨진 우리들의 얼굴과 연탄 불에 들어간 집게처럼 벌게진 깡마른 손.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의 공포가 누르는 열대야의 정적.
그 숨쉬기도 힘든 공기의 무게를 감당할 길이 없어 너울거리는 어린 나의 눈꺼풀.
간호사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그를 바라보는 찰나의 환멸 어린 간호사의 눈동자... 그 '눈동자'
생을 끝내려는 결심 이후의 남겨진 것은 엄마의 강박과 불안뿐이었다.
끊임없이 볶아 대고 살펴 대면서, 자식들의 인생이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개미가 수천 년에 걸쳐서 길을 닦고 자신들의 집을 지어 놓아도,
어리석은 동물의 발길질 한 번으로 그 결실이 허물어져 버리기에, 그 인생이 험난하다고 했다.
나는 생에서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해왔지만, 한 순간의 타인의 큰 소리에 쉽사리 위축되고, 그로 인한 자학의 발길질에 치일 때마다, 열심히 쌓아 올려도 쳇바퀴처럼 제 자리로 미끄러져 버리는 내 인생을 알았다.
나는 그렇게 나를 오래도록 내버려 두었다.
매번 친구들의 상처와 고민을 들어주었으면서도 속으로는 진절머리가 났다.
우리들은 처음에 고운 옷을 입고, 행복하고 곱게 자란 여느 집의 숙녀처럼 예쁘게 만났다가,
세월이 섞이고 우애가 쌓이면 마침내 전쟁고아처럼 서로의 강냉이 그릇을 까고, 뒤집고, 감춰왔던 불행의 찌꺼기를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 내보이며 눈물짓고, 서로의 불행을 위로하는 일들이 일상화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살면서 한 번씩은 겪었던, 또는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상처 어린 과거를 헤치고 후벼냈지만,
처음부터 무엇이 문제였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그 끝에는 어쨌거나 그 누구도 피해자 또는 가해자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남아 있는 것들은 전쟁에서 상처받고 살아내며 버텨온 자들과 그들의 가슴속 깊이 박힌 트라우마의 파편 덩어리들 뿐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가슴이 저미고 시린 일을 기억하는 짓 따위는 그만두고, 누가 잘못했고 누가 문제였는지를 말하는 것에도 완전히 손을 놓고 싶었다.
시린 기억에 놓여있는 그 이름들을 입에 담을 때조차 쓴 맛이 났기에, 나는 한 번도 행복을 구걸해 본 적 없는 것처럼 깨끗한 새 놋그릇을 들고 서서 행복을 꾸미고 웃음으로 나를 그렸다.
그러나 나는 새벽달을 바라보았던 그 어느 날, 이제는 무릎의 상처 입은 흙먼지를 털어 내고 디디고 넘어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내 기억의 눈동자를 흔들림 없이 똑바로 다시 바라보고 못다 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생의 목을 죄고 있는 쇠사슬을 끊고, 묵직한 우울의 씨앗을 털어내며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므로 이렇게 나는 지난 내 나름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 '눈동자'를 첫 대면했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피로감, 또 다른 이에게는 마치 악몽의 드라마 같은 사연일 수도 있겠지만 정작 나는 그 시간들을 무어라고 단정 짓기가 어렵다. 중요한 것은, 어찌 됐든 시간은 계속해서 나를 밀어 내고 나는 그 지난날의 하루 속에 나를 가두고 언제까지나 정지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둠을 멈추는 달빛, 그것은 내 안의 힘이며 무겁지만 느린 힘으로 기억을 쓸어내리라.
그러니, 달아. 오늘은 나를 위해 빌어본다.
달아. 하고 부르자, 열넷의 내가 ‘예에’ 하고 비틀비틀 동그마니 떠오른다.
얼음송곳이 콕콕 박힌 가슴을 안아 푹푹 삶아 녹여내고, 매일 보던 상처 입은 민 낯을 은하수에 세수시키고, 무수히 빌어 댔던 지난날의 어리고 아픈 나의 기도를 내려놓는다.
무겁고 아팠지만, 이제 그만 놓고 가자. 열네 살의 나를 가만가만 안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