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1980년대에는 학교에서의 처벌이 잦았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종을 친 다음에도 자리에 앉지 않거나 수업 시간에 떠드는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에게 매를 맞았다.
내 짝지는 말이 없고 늘 약간 옷에 무언가 묻어 있는 마르고 초췌한 아이였는데, 그 애가 크게 뭘 잘못한 것도 없지만 아이들은 모래를 뿌리거나 거지라고 놀리곤 하였다. 그 아이가 풍족하게 자라지 않았다는 것은 하교 후 들어가는 집을 우연히 보아서 알고 있었지만 가난이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어느 날 담임교사는 너무 떠들었다는 이유로 반 전체 아이들을 소위 ‘동작 그만’이라는 상태로 자리에 눈도 깜박이지 말고 그대로 앉아 있으라는 벌을 받았다. 그런데 그 짝지가 조금 흔들렸는지 담임은 그녀를 향해 교탁에 올려져 있던 작은 종을 던졌다. 그것은 담임이 시끄러운 2학년 아이들을 정리시킬 때마다 개 훈련을 시키 듯 흔들던 쇠로 만든 것이었는데, 내 짝지를 향해 던진 종이 하필이면 옆에 있던 나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새빨간 피가 턱밑을 지나 어깨까지 뚝뚝 떨어졌지만 나는 움직이면 안 된다는 담임의 말에 꿈적도 않고 그 아픔을 참아야만 했다. 담임은 나와 나의 부모에게 크게 잘못했다며 사과했지만, 그게 다 내 짝지 때문이라며 말 없는 내 짝지의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짝지의 가녀린 입술은 새파랗게 갓차란 풀잎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이와 비듬이 가득했던 얇고 거친 머리카락을 가진 작은 머리도 갈대처럼 하염없이 흔들렸다.
그저 가난하게 태어났을 뿐이었던 그녀도, 아무 이유 없이 우연히 쇠 종을 맞은 나도 어떤 잘못은 없었다.
지금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 나는 ‘살아오면서 내가 당최 무엇을 잘못했던 걸까’ 끊임없이 자문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내가 이 글의 첫 화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연한 교통사고와 같은 일이었다고 스스로 다독일 수밖에.
상황을 객관화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꼬박 3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아마 나는 평생을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들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처럼 인생에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징계 와도 같은 것이었고, 나 자신을 자책하는 것으로 그 벌의 무게를 더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름 멋지게(?) 회사를 박차고 나온 뒤, 포스트코로나 시대인 덕분인지 내 경력 때문인지 모르게 내게 들어오는 오퍼는 연 이은 성화였다. 나는 오라는 곳이 많았고 원하는 연봉과 조건에 맞추어 직장을 고를 수 있는 정도의 경력을 갖추고 있었다. 매일같이 면접 의뢰와 헤드헌터사의 연락이 이어졌다.
이전 회사에서 퇴사할 시 나는 직장 괴롭힘으로 신고를 하겠다고 했었다. 그랬더니 인사과 직원들은 그제야 내가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하였고 그 조건으로 퇴사를 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끝까지 어디까지나 나를 도와주는 것이지 실업급여를 받기 위한 모든 절차와 증명은 내 스스로 해야만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나는 내 커리어가 끊길 것이 두려워 실업급여 신청도 못하고 구직 자리를 바로 찾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한 최적의 조건 속에서도 막상 일을 하려 하면 두려움이 앞섰다. 분명히 나는 그때 누구보다도 행복했고 어느 때보다도 만족스러운 일상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뒤돌아 생각해 보니 그 작고 볼품없이 초라한 J부장을 왜 그리 공포스럽게 생각했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또한 전 직장의 사장은 그릇이 작고 길에서 보면 정말 그냥 보잘것없는 아저씨에 불과할 뿐인데, 그런 사람들 때문에 내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한 직장에 오래 갇혀 있던 것이 너무 억울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완벽한 번아웃에서 찾아오는 불안과 무기력은 동시에 내 목을 죄고 있었다.
나는 하루를 48시간처럼 쪼개어 모든 일에 동선을 그리고 계획하며 스스로를몰아붙였으며, 잠시도 쉬는 것을 참지 못했다. 매일같이 야근과 바쁜 업무를 해냈던 내게 주어진 자유라는 이 한없는 시간이 주체가 안되면서도, 동시에 ‘어떻게 얻은 자유 시간인데 이제까지 회사의 일만 하느라 버려온 시간이 아까워. 하루라도 더 많이 이 것을 모두 누려야겠다.’는 결심은 나를 거의 강박에 가까운 일상의 빡빡한 일정 속으로 밀어 넣으며 다시 스스로 내 목을 죄고 있었다.
또한 다시 어디에 속하여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무언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더럭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일과 사람과 그로 인해 내가 짊어질 스트레스와 삶의 무게가 버거웠다. 누군가들에게 쉴 새 없이 종속되고 다치고, 그러면서도 정작 또 남을 보호해 보겠다고 아등바등 대고, 그러면서 나는 조금씩 무너져 내렸던 건데 그동안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 아닌가. 내가 마침내 산산이 바스러졌을 때조차도 사람들은 그동안 그렇게 힘들었던 걸까 의아해했을 정도로 나 자신도 몰랐으니까.
내게 남은 트라우마, 바로‘사람에 대한 공포’와 ‘무능력하다는 자괴감’은 나를 위축시켰다.
한 번 참았다 터진 것은 이제 다시 참을 수가 없었다. J와 약간의 비슷한 사람만 보아도 등에서 식은땀이 나고 간담이 서늘했다. 잘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도 필시 사이코패스일 거야. 결국에는 나를 농락하고 나를 다시 정신병으로 몰아넣겠지.’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동시에 다시 일을 시작하려 할 때면 전 직장의 사장에게 내쳐졌다는 생각으로, ‘그래. 이제까지 일한 것은 전부 물경력이야. 처음엔 일을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조금만 있으면 내 무능력을 다들 알게 되겠지. 나는 멍청하고 정말 일도 못하는 바보야’라고 자책하기에 이르렀다.
규모가 큰 스타트업 기업에서 전 직장 대비 높은 직급과 더 높은 고액 연봉을 불러도, 대기업 두 곳의 최종 면접에 들었어도, 막상 최종 면접장에 들어서거나 입사일이 다가오면 다니기 싫다는 생각에 심드렁해졌다. 내가 나중에 다니게 된 한 회사의 부서장은 면접을 보는 두 시간 내내 별로 하고 싶은 욕구가 없는 것 같은데 대답은 그럭저럭 잘하는 것을 퍽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결국 나는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곳보다 적당히 일하며 좋아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이직했다. 그러나 그곳도 3개월을 채 다니지 못하고 관두었고, 이후 들어간 중견 기업에서도 6개월을 채 버티지 못하고 사직서를 내게 되었다. 회사 임원을 포함한 사장까지 모두 나의 퇴사를 끝까지 말리며 ‘아니 그렇게 힘든 곳에서도 18년을 버텼다면서 겨우 이 정도도 못 버티는 것이냐’라고 잡았지만 나는 정말 이제 조금의 어떤 것도 참을 수가 없었고 모든 것이 두려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곳들은 모두 내 전임자들역시 오래 버티지 못하고 퇴사한 자리였다고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고르고 골라 그런 자리를 택한 나도 경력 단절에 대해 무언가 불안한 나머지 너무 성급한 결정을 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다. 자꾸 방어적이 되었다. 옆 자리 직원에게 무심코 건네주었던 간식도 어느 날부터는 갑자기 주려다 가도 멈칫하게 되었다. 어떤 일에 그 직원이 실수를 하더라도 잘못한 게 내가 아닌데 내게 덮어씌울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더럭 났다.
사람들에게서 ‘당신은 이렇게 능력 있는데 왜 그렇게 큰 회사를 그렇게 오래 다니다 그만둔 거냐.’는 물음이 이어질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었지만 나중에는 말하기 괴로우니 더 이상 묻지 말아 달라고 했다. 나는 뭔가 사연 있는 여자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지만 어차피 할 일만 하면 되니 딱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 위로라도 할라치면 그것조차 싫었다.
나름대로 괜찮았던 나의 삶이 누군가의 위로로 갑자기 하찮아지기도 한다.
조직에 섞이지 않고 혼자로도 썩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혼자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면 더 외로워졌다.
그 사이에 의지했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삶의 목적과 방향성을 잃어버렸다.
끝없는 허무감이 밀려들며 스펙을 강요하는 경쟁사회가 신물이 났다. 나는 사회에서 한없이 도태된 낙오자가 되어버렸고, 세상 속 미아로 그냥 버려진 느낌이었다. 그런 마음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나의 방황은 언제쯤 끝날까?
나는 두 번째 사춘기에 접어든 것이다. 중년에 찾아온 사춘기는 지독했다.
사십 대의 사춘기는 허무와 싸워야 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여 나를 버려두고 돌보지 못한 대가를 이제 와 받고 있었다.
‘나는 나에게 징계다. 벌이다.
내 꿈은 어느새 힘들이지 않고 그저 숨만 쉬며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 사는 것이 되었다. 그러다가 빨리 세상을 뜨기라도 하면 고마운 일이다.’
행복도 불행도 없지만 가슴속은 늘 거센 파도가 쳤다. 그러나 나는 이제 헤어 나오려고 발버둥 치지조차 않았다. 바다 가운데 어지러운 태풍의 눈 속에 그저 침잠해 있었던 것이다.
두려웠다.
나의 꿈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나를 보호하며 살아야겠다는 것뿐이었다.
술을 엄청나게 마신 어느 날은 죽도록 울고 싶었다.
어쩌면 오랜만에 술을 그렇게 마셨던 것이, 마구 울고 싶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과거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것조차 참으라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들은 내게 술 마시고 약을 먹고 닥치는 대로 약속을 잡는 것들을 하지 않아도 여기에서 벗어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내 감정을 회피를 해야 하나?
다 묻어두고 회피해 버리면 행복할까?
잊으라는 그들의 조언도 다른 이름의가스라이팅 아닐까?
‘제발 나를 내버려 둬 주세요. 자유로워졌다면 그것으로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감히 권하지 말아요.’
희극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관객들을 실컷 웃겨 주고 돌아선 무대 뒤에서 때때로 허무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직정인들의 삶도 그네들과 무엇이 다를까..
내게는 떠올리면 죽을 것 같이 힘들고 잊히지 않는 그 일 들이,왜 남들에게는 쉽게 그렇게 용서되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