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 6) '태양이 뜰 때, 달은 몰락한다.'
문제는 죽어라고 해내는 성실성에도, 혹은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쉬어가는 여유로운 마음에도 있지 않았다.
어떠한 삶을 살든지 간에, 나는 자꾸 내 편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죽을 것 같이 바쁜 삶에서는 항상 피해의식과 목적 없는 삶이 자리 잡고, 느긋한 여유로움 속에서는 뒤처지고 있다는 죄책감과 자책으로 괴로워했다.
어떤 삶의 모습이든 만족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어제와 오늘의 일상이 같음에도 매일 천국과 지옥의 삶을 오가고 있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 피로한 삶... 내 앞에 주어진 일들을 그저 묵묵히 꾸준하게 해내면 안 되는 것일까.
나는 사는 의미를 잃어버렸다.
저 넓고 광대한 우주 속에 작은 별 하나보다도, 먼지보다도 못한 나라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 애쓰고, 힘들이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에도 아무 의미가 없는데. 우주를 연구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대체 이 허무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궁금해져서 매일같이 철학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삶의 의미는 더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배운아, 너는 맨날 그렇게 책을 좋아해서 책 얘기만 나오면 줄줄 말이 끊이질 않고, 책 속에서 세상을 배우면서 왜 한 번도 그쪽으로 일할 생각을 안 해봤어?”
그러고 보니 잊혔던 꿈이 떠올랐다. 원래는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사서 일에도 관심이 생겨 찾아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회사 일이 너무 고되고 늦게 끝나다 보니 야간에 다닐 수 있는 학교라도 수업 시간을 맞출 수 없었기 때문에 포기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 않은가.
뜻을 굳히고 찾아보니 과연 길이 있었다. 나는 내가 원하던 학교에 문헌정보학과생으로 입학했다. 정말 너무 행복하고 공부하는 것이 이토록 재미있을 줄 몰랐다. 학교에 가는 일이 즐겁고 재미있었다. 같은 것을 사랑하는 공통점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은 내게 안식처이자 평생의 꿈의 공간이 되었다.
그동안 너무 쉬지 않았다고 생각했기에 이번에야 말로 공부하며 일을 쉬기로 마음먹었지만 최소한 학비는 벌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던 내게 또다시 뜻하지 않게 기회가 찾아왔다. 무심코 지인에게 최근에 핫하다는 구직 사이트를 추천받고 그곳에 생각 없이 이력서를 올렸는데 우연히도 바로 다음 날 한 기업의 파트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사이트에 올린 이력서를 읽었는데, 제가 감동해서 4번을 읽었네요. 저도 업무 경력이 꽤 되는데 이제껏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분을 본 적은 없어요. 저 스스로도 배운 씨에게 정말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채가 아닌 특이한 경로로 면접을 보게 되어 회사 측에서는 처음에 의심의 눈초리였지만, 결국 면접을 보고 합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또한 그리 오래 다닐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1년 정도 적당히 다니다가 사서 자격증을 따면 퇴사 후 그 꿈을 이루며 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의 사람들은 달랐다. 15명의 팀원들은 하나같이 내게 따뜻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게 한없는 관심을 보이고 나를 궁금해했다. 돌아가며 점심을 사주고 커피 타임을 갖자고 하며 이리저리 챙겨주었다. 내 옆의 어린 남직원은 내가 과거 회사에서 같이 재미있게 일했던 후배 대리와 똑 닮아 있었다. 파트장님은 항상 나의 작은 업무 성과에도 엄지 척을 날려주고, 직원들은 엄청난 능력자라며 박수를 치고 혀를 내둘렀다. 내가 18년 6개월을 몸 담았지만 아프게 떠났던 전 직장의 함께 웃고 울며 죽이 잘 맞았던 동료이자 친구들을 닮은 사람들이 이곳에 있었다. 이 또한 야근이 많고 격무에 시달리는 환경이었지만 그럼에도 동료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지지했다. 늘 나를 배려해 주고 앞으로 정말 잘할 것 같다며 기대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회사 생활을 오래 할 생각은 없었지만, 만약 회사원으로 남는 다면 이곳이 나의 마지막 직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이 고마웠다. 이 것이 정말 정상적인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느꼈다. 엄청나게 낮아진 자존감에 주눅 들어 있던 나는 조금씩 내 자리를 확보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잘해야겠다는 중압감도 엄청나게 다가왔다. 계속되는 불안감으로 너무 초조했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고 다시 꼭 정착하리라. 차라리 이럴 시간에 공부를 더 하자. 시간이 많다고 해서 공부를 더하는 것도 아니다. 효율과 집중이 중요하다. 잡생각을 떨쳐버리자.’
J형의 나는 바로 계획에 착수했다. '
약속은 최대 일주일에 한 번만 잡는다. 여행 등은 분기별 1회 정도로 제한하고 약속도 대폭 줄인다. 매일 12시 취침 5~6시 기상을 습관화한다. 영어단어는 아침, 밤에 외운다. 책은 지하철과 자기 전 틈틈이 읽는다. 운동은 학교가지 않는 날과 주말 하루로 총이틀을 꼭 한다. 틈틈이 스트레칭으로 단련한다. 멘털을 잘 잡자. 집중력을 높이자. 다른 생각하지 말고 SNS도 그만 보자….'
생각이 일하는 것을 멈춰야 했다.
미친 듯이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했지만 약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이겨내고 싶었다.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엇도 당장 이루어 내는 게 없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을 벗어나고 싶었다.
‘배운아. 충분히 잘하고 있어. 지금 의미 없는 시간들이 아니야. 충실하게 회사에서 돈을 벌며 가사에 기여하고 있어 좋아하는 책과 함께 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어. 돈을 많이 못 벌어도, 영어를 잘 못해도 너는 너로서 충분하다. 자꾸 힘들었던 시간으로 돌아가려는 본능 때문에 그런 거야. 지금 하루하루를 감사해하자 건강하고 사랑하는 아들이 있어. 20년간 열심히 일했고 지금을 일궈왔어 너의 가치를 너 자신이 훼손하지 마. 징계를 주지 마.’
항상 나는 내 생각, 내 느낌을 말로 딱 정의해서 말하는 것이 어려웠었다. 이건 슬프다, 기쁘다, 좋다 등이 아니라 좋은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등등의 표현을 많이 썼다. 앞으로는 좀 더 확신에 차서 내 감정을 말하고 싶어 져서 일부러 정의 내린 표현을 쓰려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끔 물 밀듯이 슬퍼질 때가 있었다. 왜 이렇게 슬픈지 생각해 보았다.
원망하고 싶었던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왜 그토록 나를 미워했나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때때로 나를 쳐다보던 J부장의 그 서늘한 눈빛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일로 인정받던 내게 보였던 처음의 선한 웃음과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 눈빛과는 너무나 달라서…
차라리 내가 처음부터 너무 조직에 헌신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게 너무 아파서. 한 번이라도 미안했다고 했다면….
몇 천 번이고 그들에게 되물었던 그 원망이 잊힐 때쯤, 또다시 내 인생은 뜻하지 않던 사고로 나를 침몰시켰다.
드디어 태양이 뜬다고 생각했을 때, 달도 몰락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