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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운 Dec 26. 2023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랬어요?’라는 물음.

직장 내 괴롭힘 그 후_9) '막연자'

사람이 막 날아오르려 할 때
인생은 느닷없이 도약의 팔을 꺾지
마치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라는 듯,

그래, 너는 그렇게 큰 세상이라는 존재라서
나라는 미물의 꺾어짐 따위는 신경 쓸 일도 아니라는 듯.

그러나 그것은 바로 세상 네가 두려워하는 것.

크고 거친 너조차도 미처 소유하지 못하는 내 정신의 뿌리.
너무 크기에 세상이 차마 가져보지도 못한 인간의 연민과 다정한 사랑.
그 질투로 인한 휘몰아쳐대는 너라는 세상

나는 네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나 절대 너의 소유가 되지 않겠다.
절망으로 순종하라 할 때 행복으로 벗어나겠다.

그러니 이미 너는 내게 졌다.                        

<눈을 처음 맞은 올해, 배운의 왼손 일기>



아침이면 니체와 조우를 하고 아이 저 너머로 건너가는 희망의 초월적 자아룰 꿈꾼다.

낮이면 먹고 싸고 냉장고 채우기에 집착하는 욕구에 충실한 에픽쿠로스와 춤을 추고,

저녁이면 척추를 관통하며 찍어내리는 도끼에 저항하며 쇼펜하우어와 불행의 극치에 대해 통렬한 동감의 악수를 나눈다. 고통으로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궁극의 미친년 널뛰기정신이 아니고서야 정녕 무엇이란 말인가.


다행히도 3차 수술 후 손가락이 움직이고 팔을 조금씩 들 수 있었다. 일말의 신경이 살아있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1,2차 수술을 했던 병원에서는 내 재활 비용을 전액 부담하기로 하였다.


매일 일어나는 소소한 충격은 이제 담백하기까지 하다.

‘평생 100으로 돌어간다는 보장이 없다. 일상생활은 할 수 있어도 책을 드는 일과 같은 사서일은 힘들 것이다. 이제 준 장애인란 인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

그래도 내게는 단지 먹고 싸는데 지장이 없는 튼튼한 위장이 있음에 감사하며 이 여유로운 돼지의 삶에 충실해야 할까.


평소 실루엣이 드러나는 니트 원피스와 하이힐을 즐겨 신고 늘 40킬로대의 몸무게 자릿수에 집착하던 나는 둥글둥글한 마시멜로우처럼 부풀어갔지만 가슴속은 매일같이 가늘게 늘어서는 불행의 실타래만큼이나 가늘게 가늘게 말라 들어갔다.


그래서 막연자. 앞으로 나는 나를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막막한 사람, 막다른 길에선 막 돼먹은 사람…


병동에 머문 지 한 달여가 되어가는 어느 날 어김없이 새벽에 깨었다.

평소에도 잠이 없는 편인데 더욱 활동이 없으니 잠을 잘 잘리 만무하다.

팔이 안 아프면 글이라도 쓰련만. 책 읽는 것도 1시간만 넘어가면 척추에 칼을 꽃은 듯하니 오디오북을 몇 개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이도 저도 힘들면 그저 멀거니 누워 하염없이 하얀 천장을 바라보는 것이 일이다.

1분 1초를 쪼개어 살던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습관인데… 이런 시간도 퍽 괜찮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명상의 기법이랄까. 나름 시간도 꽤 잘 간다.


문득. 풀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람들에게 따스함과 평안함을 주지만 이름 없이 사라져 가는 풀꽃.

나는 그런 존재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다 갑자기 취향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옮긴다.

이렇게 생각이라는 것이 꼬리를 물고 다른 주제로 자연스레 넘어가는 것도 재미있다.

원래 명상은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했는데, 나의 명상 기법이라 할 것 같으면 이렇게 생각이 변하고 넘어가는 과정을 저 멀리서 관찰자의 시점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나는 라면이던 가락국수이던 약간 퉁퉁 불은 것을 좋아하는데, 이제는 좀 불은 면처럼 시간에 기대어 느긋하게 부은 편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이 참에 내가 좋아하는 것 들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나는 사실 주관이 없고 남에게 많이 맞추는 편이라 좋아하는 것이 많아도 딱히 주장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우선은 ‘~하는 것 같다. ~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부터 멈추어 본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떠 올려 본다.

좋아하는 사람 = 다정한 사람. 좋아하는 것 = 부지런히 글을 쓰고 읽는 것. 좋아하는 일 = 전시를 보거나 음악을 듣고 미술관에 가는 것…


오른팔이 움직이지 않는 대신 아픔이 잦아들면 그러한 것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잠시나마 안도한다.


‘불행’ 동전의 뒷면은 바로 ‘다행’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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