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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운 Dec 30. 2023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랬어요?’라는 물음.

직장 내 괴롭힘 그 후_10) '그렇게 서로에 기대어'

이제부터 조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보겠다. 알고 보면 나는 사실 꽤나 웃기는 입담꾼이니까.

 

내가 입원한 뒤 병동 생활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지루할 만큼 반복되는 하루지만 그 소소한 일과와 함께, 어우러진 사람들 속에서도 나름의 즐거움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인생이라는 게 넋 놓고 떨어져서 관찰하면 꽤나 웃기는 시트콤이다. 그렇지만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TV속 명장면에서도 삶의 희로애락을 통해 배우는 게 있듯이, 삶의 한 조각을 떼 내어 살피다 보면 아하! 하고 무릎을 치는 날도 있는 것이다. 



병원에서 섭생의 본능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다 보면, 딱히 하릴도 없어 병동 안의 사람들을 넋 놓고 관찰하게 된다. 낯을 꽤나 가려 사람들과 섞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 다인실을 쓴 적이 없었는데, 뜻하지 않게 입원 기간이 길어지며 하는 수 없이 6인실을 쓰게 되었다. 그랬더니 혼자 독방을 쓸 때는 몰랐던 이야기들이 병실 안에 넘쳐흐르더라는 것이다.  


내가 있던 곳은 통합간병센터로 간병할 보호자의 상주가 불가하였고 여러 과의 다양한 환자들이 같이 어울려 입원하였다. 

대체적으로 나이가 있는 환자들은 서로 통성명을 하며 연락처까지 주고받는 경우도 있지만 다소 젊은 측에 속하는 환자들은 말은 많이 섞지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서로가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좁은 침상이 답답하기도 하여 슬그머니 커튼을 반쯤은 쳐 놓고 있는 상태인데, 대체적으로 몸의 한 두 군데가 불편하여 통상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하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아도 서로의 사적인 대화도 들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는 말도 안 되게 ‘환우애’라는 것을 다지게 된다.


며칠 감지도 못한 머리가 가려워 소리 나게 벅벅 긁어대거나, 참아지지 않는 방귀를 북북 뀌어대어도 서로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초자연적인 상태의 벌거벗은 민낯의 우리들. 하물며 가스가 배출되어야 수술이 잘 된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가스 분출에 성공하는 환우를 보면 왠지 모를 뿌듯함마저 들게 되는데, 그것이 전우애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꽤나 진하고 독한 우정이 아닌가.


병동에서는 모두 여기저기 아픈 상황에서 딱히 남의 처지를 살필 일도 아닌 사람들이 그렇게도 서로를 긍휼히 여긴다. 


다리를 저는 사람은 자기 다리가 아픈 것보다도 팔이 아파 수저를 못 드는 사람을 딱하게 여긴다. 항암약 때문에 속이 안 좋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도 제 코가 석자 (이런 험한 말은 좀 죄송하기도 한데 내가 지인들에게 남을 걱정할 때 종종 들은 말이라… )인 판에 장기 절제 수술로 인해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사람을 걱정한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서로가 가진 질병으로 인해 통증으로 인한 신음 소리가 오케스트라처럼 연주되기 시작하는데, (어째서 밤만 되면 통증이 더 격해지는지 정말 궁금하다.) 한 환우가 진통제를 찾으면 돌림 노래처럼 여기저기서 진통제 처방을 위한 호출벨을 눌러 댄다. 진통제를 맞은 뒤 조금 편안해진 대신 잠이 달아나버린 아주머니들은 옆 침상의 또래와 도란도란 사는 이야기를 하는데, 단 몇 시간의 단출한 대화에서 생겨난 서로 간의 긍휼함이 우정이 되어 퇴원할 때는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헤어짐에 대한 아쉬운 눈물 자국을 찍어 내기도 한다.


나는 3차 수술을 한 뒤 입원한 처음에는 며칠간 내 침상의 커튼을 친 채 아침저녁으로 휴대전화를 붙잡고 엉엉 울곤 하였다. 내 걱정에 얼굴이 상하고 밥도 잘 못 먹는 비쩍 마른 아들 걱정에 눈물,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내 팔의 통증에 눈물,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내 팔자타령에 서러운 눈물… 울어야 할 명분은 다양했지만 그때까지는 몰랐다. 내가 통화를 하면 뭔가 주변이 조용했던 것은 6인실에 함께 있던 환우들이 그때마다 자신들이 먹고 있던 과자 봉지를 뜯을 때조차도 소리가 날까 조심했었다는 사실을. 

나와 함께 입원했지만 나보다 더 늦게 퇴원한 젊은 아가씨가 개복 수술로 3주가 넘게 묽고 허연 죽 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여 그저 자신의 아버지에게 서러운 투정을 부리던 순간 내가 입 안의 과자를 흐르는 침을 삼켜가며 간신히 녹여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에야 나는 그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가끔은 나로서는 정말 보기 힘든 환자도 같이 방을 쓰게 된다.

어떤 아주머니는 단 이틀을 입원했지만 커다란 캐시미어 가운을 둘둘 두르고 니트 방울 모자와 털 슬리퍼를 착용한 채 항상 자신의 머리카락이 침상에 눌릴까 조심했었다. 그녀는 침대를 올리고 내릴 때마다 밤이고 새벽이고 호출벨을 눌러 간호조무사님을 부르고는 했는데, 퇴원하는 날이 돼서야 한 간호사가 리모컨으로 침대 조절이 가능하다고 알려주었더니 그때까지 전혀 몰랐다는 얼굴로 진즉 알려주지 그랬냐며 놀라워했다. 그녀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하루 종일 온갖 검색을 하며 지냈으면서, 오밤중에 아무 불평 없이 침상을 조절해 주는 간호조무사님의 고된 손은 왜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일까.


또 내 앞 침상에 잠시 입원했던 어떤 할머니는 병원의 무엇이 그리 맘에 들지 않는지 간호사들을 보기만 하면 온갖 불평을 늘어놓고는 했는데, 늘 간호사님 혹은 선생님이 아닌 ‘아가씨’라는 호칭을 썼다. ‘아가씨, 이것 좀 해줘.’ 하고 반말로 말도 안 되는 요청을 한 뒤에는 ‘하나같이 말도 못 알아먹고 한심한 것들, 개판이야. 아주.’ 하고 중얼거리고는 앞 쪽에 앉은 나를 심술궂게 쏘아보곤 하였다. 나는 그 할머니의 얼굴을 마주 본다는 사실조차 질색하여 할머니가 보이는 방향에는 늘 커튼을 치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아침에 검진을 위해 이동을 도와주시는 남자 조무사님이 오실 때에는 ‘아유 고맙습니다. 친절도 하시지.’하며 세상 푸근한 웃음을 보이는 게 아닌가. (내가 할 일이 없다 보니 말도 안 되는 상상이 극치에 다다른 시기이기도 했지만 그 할머니가 어찌나 요염하게 웃으시던지 나는 저 할머니가 설마 작업이라도 거는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한 ‘독한 할망구’ 마저도 당신이 가여워하는 자식이 있기 마련인데, 아픈 엄마에게 그저 하염없이 미안하여 엉엉 우는 딸에게 ‘나는 괜찮으니 너나 아프지 말아라’라며 눈물을 훔쳐 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인간의 잔인함과 연민의 이중성에 대해서 대책 없이 궁금하지만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하더라도 매번 나는 그 할머니가 부르는 아가씨라는 호칭이 듣기 싫어 한 번은 내 담당 조무사님에게 슬그머니 그 할머니의 험담을 흘렸는데 도리어 조무사님은 초연한 듯 웃으시며 ‘에유~저러신 분 많아요. 더한 분들도 계시는데요 뭐.’하며 받아치시는 것 아닌가. 나는 새삼 의료계 종사자분들에게 격한 경외심이 들어 진심으로 감동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게 그 할머니는 끝까지 ‘예의라고는 없는 막돼먹은 할망구’여서 말도 한마디 시키지 않았지만, 막상 그녀가 퇴원할 때 말없이 내 자리에 두고 간 한 주먹의 대추토마토의 다정함에 조금 코끝이 시큰 거린 것도 사실이다.


어느 한 날은 한 지역에서 지진이 나서 새벽에 급작스러운 재난문자가 울렸다.

전쟁을 한 차례 겪어본 세대의 어른들은 다들 아파서 피난도 못 가겠다며 농을 섞으며 울상을 지었다. 


밤이면 여기저기 신음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하여 죽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싶다면서도,

새벽의 재난 문자에 당장의 피난을 걱정하며 살아낼 궁리를 생각하다니. 인간의 삶에 대한 의지는 그 얼마나 강렬한 것인가.


그곳에는 매일 서로의 비상식량이 들어있는 작은 냉장고를 뒤적여 바나나며 요구르트를 나눠주고 그 답례로 내가 건네는 쿠키 한 조각에 ‘사랑해’라고 화답하는 애교 많은 할머니의 다정한 인사도 있었다. 

머리가 다친 한 여인이 자신은 미혼이라고 소개했는데 퇴원할 때 남편이 데리러 온 것을 보며, ‘필시 저 것은 제일 잊고 싶었던 것을 처음으로 잊었거나, 혹은 이 기회에 잊은 척하는 것이다’라며 농담을 하는 환우들도 있었고, 병동이 너무 덥다며 침대 밑바닥에서 자다가 새벽에 회진을 온 간호사를 까무러치게 만든 아주머니와 너무 아픈 나머지 통화하는 가족들에게는 있는 대로 신경질을 부리지만 남자친구에게는 한 없이 웃음이 많던 귀여운 젊은 여인도 있었다.


저마다의 사연과 저마다의 아픔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기둥이 되는 좁은 병동 안에서 나는 작게나마 굴곡 많은 인생사를 느꼈다. 그렇게 얼마 간을 겪어내고 나니, 입원 후 밤마다 중얼대던 분노와 저주의 말들은 어느덧 바람처럼 산산이 흩어지고, 입 속의 모래알처럼 까끌거리기만 하던 나쁜 기억들은 ‘의미 없음’이라는 폴더명으로 지정되어 내 머릿속 휴지통에 들어가는 것으로 자연스레 마무리되었다. 


아프고 서러워도 서까래처럼 서로에게 기대고 마음을 비벼 섞어 사는 사람들. 아직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슬그머니 이런 생각이 든다.


덕분에 우리는 얼마 간 더욱 아름답게 살아 낼 힘을 얻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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