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 그 후_11) '쓴다는 것의 위로'
선생님,
‘집’이란 제게 늘 도망치고 싶었던 공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행복했던 기억은 여섯 살 때까지가 전부입니다.
어머니는 제게 ‘따뜻한 삼시 세끼’로 표현하는 것 이외에 정서적 허기를 채워주시지 못했고,
이후에 폭력이 난무하는 아사리판에서 생존해야 했던 나의 어머니는 제게 살기 위해 버티고 이겨내는 것을 강요하는 것 이외에 필요한 사랑 사랑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사랑을 주는 법을 모르셨던 거겠죠.
그렇게 도망치듯 떠나 살게 된 신혼집도, 제가 편히 머물 수 있는 집은 아니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보다 둘이 있을 때 뼛속까지 아린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20대는 고통이었고, 30대는 지옥이었습니다.
마흔이 넘어서 전쟁 같은 인생을 끝내고 싶어서 시작한 글쓰기, 그것이 저를 살게 해 주었고 어쩌다 굴러 굴러 작가님의 집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집이라는 공간이 이런 곳이구나’하고 느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딸을 사랑하는 엄마의 모습은 바로 선생님 같은 분이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무한히 대가 없는 사랑에 적잖이 당황해하고 그것을 불편해합니다. 받아본 적이 없어서, 선생님이 주시는 따스함에 자꾸만 방으로 숨어 버리려 했나 봅니다. 제가 다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이렇게 글로 대신합니다.
안전하다고 처음으로 느낀 ‘집’에서 글로 제 마음의 집을 짓고 갑니다.
부디,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게 머물러 주세요.
감사합니다.
-2023년 1월 생일에 선생님 댁에서, 배운 –
중학교 때부터 시를 썼다. 어두운 표정과 큰 소리와 솟구치는 분노의 표출과 낮은 한숨 소리만이 집 안에 난무할 때에 나는 귀를 틀어막고 죽어라고 시를 썼다. 그 시는 쌓이고 쌓여 어느덧 2천 편이 넘어버렸다. 그 사이 짧은 단편 소설도 하나 썼다. 죽기로 결심한 청소년이 마지막으로 바닷가를 찾았는데 희망에 넘치는 한 아저씨와의 대화 끝에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바꾸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을 건네준 아저씨는 바닷가 건너편 길을 건널 때 마주 오는 뺑소니 차에 치여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이런 어쭙잖은 단편을 왜 쓰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춘기의 청소년이 으레 그렇듯 나도 아마 지독한 염세주의자였으리라.
결혼을 약속하고 내 방의 짐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것들을 모두 찢어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옥상에서 불태워버렸다.
지금은 그 일을 매우 후회하고 있지만 그때 나는 새로운 인생으로 들어가는 시점에서 과거의 나를 송두리째 잊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남긴 흔적을 행여 누가 보기라도 할까 두려웠고, 이제는 모든 것을 털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소위 ‘팔자’라는 것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커다란 사건 사고가 있어도 엄청나게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축복의 순간이 찾아와도 그것은 큰 인생의 울타리 밖에서 보면 얽히고설킨 노끈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산속에서 사는 시인이나 대도시에 사는 직장인의 삶의 고충이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남편은 내게 항상 꿈속에 산다고 말한다. 어떤 사건으로 지독한 현실을 자각하면서 퍼뜩 정신을 차릴 때가 차라리 나은 것 같다고 나 또한 생각할 때가 있다.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것만 같은 큰 사고를 겪었지만 내 팔자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게 언젠가 평생 잊을 수 없을 행운이 찾아와도 내 운명의 수레바퀴가 엎어질 염려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내가 있는 공간과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나의 마음뿐인 것이다.
사람들은 늘 자신에게 집중하라고 하지만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만큼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내게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 있을까. 그러한 시간을 견디고 나면 마음을 흔들어 대던 내 주위의 일들은 모두 ‘그깟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나는 글쓰기를 한다. 팔의 마비로 자판도 두드리지 못했을 때에는 왼손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짧게 메모했다. 잊지 않기 위해 여러 번 되뇌며 읊어대다가 마침내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는 바로 노트북에 옮겨 적었다. 30분을 쓰고 나면 하루 종일 누워있어야 했다. 1시간을 쓰고 나면 진통제를 맞아야 했다. 간호사님은 회진을 올 때마다 내게 ‘배운 님은 올 때마다 항상 무언가를 하고 계시네요’하고 말했다. 나는 그런 것이 내 회복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기뻤다. 지금도 글 하나를 올리고 나면 저녁까지는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한 동안은 글을 쓰지 않아도 다른 것을 할 힘이 생긴다는 것을 믿는다.
나는 아직도 매일 재활 센터에 다니고 있다. 팔이 언제 돌아올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 그것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나는 그저 크게 바뀌지 않은 매일의 내 삶에 감사하며, 소박하게 글을 짓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으로 오늘만 보며 살고 있다.
글을 쓰는 일은 매일의 내게 집밥을 지어주는 일과 같다. 나는 영원히 작가가 되지 못할지라도 아마 평생 내게 밥을 지어주는 일은 그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