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송곳'
그가 내게 마침내 이혼을 ‘해 주겠다’고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나의 사이가 매우 좋아졌을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동의한 것에 감사했고 그것을 덥석 물었다.
이혼을 하는 것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그깟 서류 한 장에 사인하는 일이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이야…그러나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혼이라는 작업을 통해 나는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이혼 숙려기간 중에 급작스러운 사고로 나의 오른 팔이 마비가 되었고 그는 나를 평생 돌보겠다고도 했었다. 지인들은 모두 하늘이 갈라서지 말라는 신의 계시라며 이혼을 보류하라고 하였다. 나는 내가 당장 벌이도 없는 데다 친구들 앞에서 나를 돌봐주겠다는 그의 말에 정말 감동하기도 했다. 그와는 정말 친구처럼 잘 지내고 있기에 딱히 이혼을 해야 할 이유도 없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와 이혼이라는 과정의 마침표를 찍기로 마음먹고야 말았다.
제발 헤어져달라고 근 2년 간을 미친 사람처럼 매달렸었다. 울어도 보고 달래도 보고 사정도 해 보았다. 그런 그를 마지막까지 붙잡은 것은 딱 하나였다.
‘내가 왜 이혼남이 되어야 하나? 내 서류에 왜 빨간 줄이 그어져야 하지?’
그는 이 말을 정말 여러 번 반복했다. 그에게 ‘체면’이 중요한 것일까 생각했지만 그런 것은 내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이 힘들 때마다 더 이상 누군가를 탓하는 내 나쁜 습관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릴 때부터 누군가에게 다 퍼주는 게 습관이 되었다. 기질 상 여리고 남의 말에 쉬이 동조하는 탓도 있겠지만, 나의 부모는 의례히 둘째는 무엇이든 양보하는 만만한 아이라는 것을 은근히 강요했다. 나의 언니가 내가 자신의 옷을 한 번 빌려 입는데 5천 원이라는 돈을 요구할 때도, 동생이 억울하게 나의 머리채를 붙잡고 내 배를 물어뜯을 때에도, 세 아이를 먹히고 입히느라 늘 바쁜 엄마는 전후사정 할 것 없이 나의 등짝을 때렸다. 징징댄다고, 예민하다고, 말이 많다고. 나는 나의 감정에 동의를 구했을 뿐인데 늘 내 탓을 하기에 바빴고 그래서 모든 것은 내 잘못이기 때문에 내가 인내해야만 한다는 것으로 귀결됐다.
피해 의식에 똘똘 뭉쳐 있었던 나를 만나게 된 남편도 어찌 보면 가엾다. 이전에 너무 힘들어 신점이라는 것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녀는 나에게 '네 남편은 너를 만나지 않았으면 아주 정상적으로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을 다 믿은 것은 아니지만 그 말에 나 또한 어느 정도는 동조했었다. 밖에 나다니지도 않고, 도박도 여자도 멀리하는 FM 모범생의 삶을 사는 그에게 나라는 여자가 너무 가혹한 것인가?
나는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른다.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그의 말이 다 맞았다.
주변 사람들이 그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늘 얘기했었다. 그는 내가 세상에서 처음 만난 ‘어른 남자’라고… 그는 항상 모든 것을 잘 판단하고 서슴없이 결정했다. 그의 친구들도 가족들도 모두 그의 의견을 구했다. 나 또한 그를 존경했다. 그는 나의 사랑이자 원가정으로부터의 구원자이자 보호자였다.
결혼할 때 그의 요청대로 나는 가족들이 모두 같이 쓰는 전화번호 뒷자리로 내 휴대폰 번호를 바꿨다. 처음에는 왜 그래야 하냐고 했지만 그의 가족이 되는 것에 어떠한 ‘소속감’과 ‘연대’를 가지는 의식이라고 동조했고 어차피 결혼하니까 그 간의 너저분한 인간 관계도 한 번에 정리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래봤자 겨우 스물다섯 살이었다.
결혼해서 나는 알뜰살뜰 가계부를 잘 쓰며 재정 관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내 가계부 작성이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내 공인인증서를 그가 갱신하고 내 카드는 모두 없앴다. 내 휴대전화와 카드 모두 그의 명의로 된 것으로 제공받았고 나의 월급은 월급날 그가 모두 내 통장에서 이체해 가고 내게 30만 원의 용돈을 주었다. 나는 맞벌이를 했지만 결혼 후 꼬박 10여 년 간을 그렇게 살았고 그 이후 3~4년 간은 생활비와 용돈을 받으며 살았다. 내가 돈이 부족하다고 불평할 때마다 그는 자신의 알뜰함 덕에 이렇게나 집 빚도 갚고 돈을 모은 것이라고 했다. 그의 통제에 숨이 막힌다고 하면서도 나는 그의 말에 반박할 줄을 몰랐다.
그렇게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게 나의 방식이었다. 사랑하면 뭐든 다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가족들마저 ‘아이를 낳고서도 너는 그렇게 네 남편이 좋으냐’라는 핀잔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래도 그렇게 그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것이 좋았다. 어쩌다 아이가 없이 그와 산책을 하게 되면 나는 그에게 내 손을 잡고 걷자고 그렇게나 졸라댔다.
아이를 낳고 맞벌이를 하는 우리 대신 시댁에서 아이를 맡아 주겠다고 하였다. 시댁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 탓에 30여 년이 된 빌라에서 아이를 키우자니 웃풍이 심하고 곰팡이가 핀 집에서 아이가 비염 등 각종 질병에 노출되는 것이 걱정이 되었다. 반면 우리 신혼집은 막 지은 새 아파트였기 때문에 나는 짐짓 지나가는 말로 시댁과 우리 집을 바꿔 살면 어떨까 했다.
그러자 그는 바로 다음 주에 나의 의견을 다시 묻지도 않고 시댁 식구들이 모두 있는 앞에서 집을 바꿔 살겠다고 공표해 버렸다. 나는 내게 왜 다시 묻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의 매서운 눈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그러자고 했다.
모든 살림을 바꾸는 큰 이사를 할 수 없어 시부모님과 시할머니가 옷가지와 약간의 살림만 챙겨 그대로 우리 신혼집으로 들어왔다. 시댁 어른들이 우리 신혼 가구와 신혼 가전을 쓰고 우리는 원래 시댁 살림을 그대로 쓰게 되었다. 그래도 시부모님은 매우 좋으신 분들이었고 나는 따뜻하고 안정된 집에서 아들을 키울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나는 주중에 우리 집에서 시댁어른들과 아들과 같이 살았고 나의 남편은 시댁 집에서 오가는 생활을 했다. 처음에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오겠다던 남편은 차로 10여분 거리인 집을 왕복하는 게 번거롭다는 이유로 점차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아침에만 오게 되었다. 나는 남편을 일주일에 한 번만 보고 육아를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속상했지만 그는 귀찮은 것은 절대 안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또한 참아내야 했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렇게 그가 항상 날이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물어봐도 그는 대답을 피할 뿐이지만 재정적으로 안정되지 않고 육아로 인해 모든 것이 안정되지 못한 상황이 아직 어린(?) 그에게 스트레스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내가 결혼할 때 그는 겨우 스물아홉이었고 아이 아빠가 되었을 때는 겨우 서른둘이었다. 내가 우리 집을 도망쳐 나오고 싶은 마음에 막내아들로 결혼이 그리 급하지 않았던 그를 설득해 생각도 못한 이른 결혼을 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결혼 전 다정하게 나를 챙겨주던 남편은 사라지고 항상 무언가가 화가 나 있었다. 주말에 같이 집으로 돌아가면 매번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부렸다. 내가 조금만 실수를 해도 책상을 발로 차거나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가 무서워서 감히 대들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지금은 그가 인상만 써도 어디다 대고 얼굴을 찌푸리냐고 같이 언성을 높일 수 있는데 나는 그것을 그가 가스라이팅한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2년을 그렇게 살았더니 나의 몸이 축이 났다. 집에서 회사는 한 시간 반 거리였기 때문에 퇴근 후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는 무조건 뛰어야 했다.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하면 늘 좋으신 시어머님이 걱정하며 밥을 차려 주셨고 그렇게 되면 아이를 돌볼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항상 밥을 먹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아이가 잠들고 나면 불도 켜지 못한 채 벽을 보고 편의점에서 사 왔던 소시지며 맥주를 꺼내 혼자 먹고는 했다. 그때는 OTT나 SNS등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서 어두운 벽을 바라보며 허겁지겁 먹는 시간이 유일한 힐링 시간이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임대 주택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시어른들을 좋은 집에 모시고 우리가 근처에 살게 되면 남편을 보지 못하는 고통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다. 고령인 시할머니가 세대주였으므로 청약은 바로 당첨되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시댁이 당첨된 임대아파트의 바로 옆 동 아파트를 운 좋게 매매할 수 있게 되었다. 시댁 어른들은 모두 며느리가 잘 들어와서 이런 복이 생긴 거라며 나를 칭찬했다. 나는 그저 우리 식구가 모두 모여 함께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뻐서 입주하는 날 집의 벽기둥을 붙잡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오히려 그때부터 나와 그의 관계는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나는 능력을 인정받아 영업기획팀으로 발령 나게 되었고 엄청나게 바쁜 일상이 시작되었다. 매일 격무와 야근에 시달렸고 아이가 잠들어서야 들어오게 되는 날이 많았다. 그는 그런 내게 항상 화를 냈지만 회사를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항상 내 이름을 불러주던 그는 이제 나를 부를 때마다 ‘야’ 혹은 ‘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가 가끔 나를 부를 때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보통 아이를 돌봐야 하는 일이 생길 때 ‘엄마, 이것 좀 해.’라는 의미였지만 나는 내가 왜 당신의 엄마냐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진저리를 쳤다.
정작 그가 나를 다시 내 이름으로 불러주기 시작한 것은 이혼이라는 과정이 시작된 뒤부터였다.
아무튼 나는 우리가 매매한 아파트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고 그에 비해 보잘것없었던 나의 연봉은 급속도로 치고 올라가 그와 동등하거나 때로는 그보다 많은 액수의 월급을 받기도 하였다. 내가 늦으면 그와 시댁식구들은 종종 밖에 나가 외식을 하기도 했는데 나는 내가 번 돈으로 소고기를 사 먹냐며 불평하기도 했지만 아들만 맛있게 먹어준다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내가 항상 늦는 탓에 그는 거의 옆 동의 시댁에 가서 아이와 저녁을 먹으며 시아버지와 반주를 하곤 했다. 내가 어쩌다 일찍 들어오면 그는 항상 취해서 풀린 눈을 하고 나에게 화를 내며 폭언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의 취한 동공을 보면 늘 두려웠고 그것이 다시 전쟁 같은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나는 그것이 싫어서 일부러 아이가 잘 때까지 일을 하다가 가기도 했다. 대신에 주말만큼은 뼈가 부서져라 아이와 노는데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
주말이면 아이를 위해 항상 학부모 친구들과 여행이며 많은 이벤트를 짰다. 거의 남편이 육아에 관심이 없거나 매우 바빠서 주말에 아이와 놀아주지 못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여자들은 아이를 데리고 늘 여행을 가고 같이 저녁을 먹었다. 아이들을 먹이느라 고기 한 점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우리들은 아이들을 다 먹인 후에야 남은 음식들을 해 치우기 위해 수저를 들었다.
그러나 남편은 그것조차 불만이었다. 매일 여자들끼리 늦게까지 몰려다닌다며 화를 내고 짜증을 냈다. 내게 말도 안 되는 인격적인 멸시와 폭언을 퍼부었고 나는 그에게 ‘얼음송곳’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그의 가시 돋친 말투와 매서운 눈빛에 항상 찔려서 아팠지만 그 또한 내 엄마가 내게 한 말처럼 너는 무척이나 예민하다고 했다.
지나서 생각해 보면 그와 늘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닌데 왜 그때를 떠올리면 안 좋은 기억만 떠올리게 되는 걸까.
어느덧 결혼 10주년이 되었다. 그날 일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때의 일이 이혼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일 나는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고 가다 그에게 전화를 해서 매우 행복한 마음으로 물었다.
“우리 결혼기념일에 뭐 할까? 어디 여행이라도 갈까? 오빠는 나한테 뭐 사줄 거야?”
무엇을 받길 원한 건 아니었지만 그저 결혼 10주년이라는 것을 기념하고 싶었다. 나는 매우 들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불 같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지하철에 사람이 그렇게나 많았는데 휴대전화 너머로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전화기 밖으로 퍼져 나왔다.
“기념은 무슨 기념이냐? 대체 10주년이 뭐라고 계속 피곤하게 그러는 거야? 서로 생일이나 챙기면 그만이지 왜 자꾸 기념일에 사랑 타령이냐? 지긋지긋하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이만큼이나 살았으면 사랑 타령은 그만해도 되는 것 아니냐? 다들 그렇게 살아. 애 때문에 할 수 없이 사는 거지 기념은 무슨 기념이야!! 제발 꿈같은 소리 좀 그만해라.”
나의 두 발이 바들바들 떨렸다. 너무 억울해서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황급히 수화기 음량 버튼을 내리면서 나의 마음도 무너져 내렸다.
나는 다이아몬드를 사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명품 백을 사달라고 조른 것도 아니다. 없는 집에 시집오면서 우리는 양가 부모로부터 십원 한 푼 받지 않고 우리 힘으로 결혼했었다. 그와 악착같이 모아서 아들만큼은 행복하게 살게 해 주고 싶었다. 나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화목한 그의 시댁 식구들을 보며 안정되고 사랑 많은 시부모님들이 나의 아들을 건강하게 키워주시는 것에 늘 감사했었다. 나는 그저 우리 결혼 10주년에 작은 케이크에 초를 켜고 아들과 가까운 곳에 여행이라도 다녀오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는 항상 그의 말을 따랐고 그를 그렇게나 사랑했는데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