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남편 K는 서울의 한 판잣집에서 태어났다.
홍수에 집이 잠기고, 나무판자 위에 올라타 등교를 하고, 여섯이나 되는 고모와 조부모와 부모와 그의 삼 형제가 한 집에 같이 살았다고 했다.
내가 그의 집에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그가 부모님과 시할머님과 함께 살고 있던 15평 남짓한 빌라에는 작은 보일러실이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만한 비좁은 보일러실에서 K와 그의 형은 벽에 긴 상판을 대고 책상을 삼아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유는 보일러실이 집에서 가장 따뜻했기 때문이었다.
K의 누나와 형은 그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그의 누나와 형이 각각 독립을 하고 군대에 갔을 때 K는 겨우 중학생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사업이 망하여 어머니와 함께 도피를 했다고 한다. 매일 같이 조부모는 소리를 지르며 싸웠고 빚쟁이들은 그의 집 문을 두드려 댔다. 어른이 아무도 없는 집에서 그는 헤드폰을 끼고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가 ‘불쌍한 부모님을 위해서 내가 열심히 공부를 해야지’ 하고 생각했다는 것이 눈물겨웠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 또한 그가 내게 전한 것은 아니었다. 말이 없는 그를 대신해 그의 가족이며 친척들이 그런 상황에서도 그가 공부를 잘했던 것을 칭찬하며 내게 해 준 말이었고, 그의 가족들은 속 깊고 사랑스러운 막내아들을 제대로 뒷바라지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하여 항상 미안해했다. 그러나 K는 항상 그렇게 자신이나 남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
또한 그는 절대 가족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어릴 적 가난으로 인한 에피소드를 웃음의 소재로 삼았고, 그의 어머니가 학교의 급식실에서 일한 것이며 공사장 인부들을 위한 백반집을 운영하셨던 것을 하나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을 보인다. 나 또한 그의 부모님을 가슴 깊이 존경해 마지않는다. 나는 나의 부모님보다 그의 어머니를 더욱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초등학교 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바다를 보러 간 적도, 부모님과 여행을 간 적도 없었다. 그는 그렇게 어릴 때부터 철든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당당한 K를 나는 사랑으로 안았다.
유년의 기억이 없는 그와 유년의 기억이 전부인 내가 만났다.
어릴 때의 추억은 없지만 부모의 사랑이 충만한 그와, 어릴 때 잠시 즐거웠던 가족과의 추억이 전부인 나. 나는 어른인 그와 그의 부모의 사랑에 기댔다.
그러나 그가 내게 사랑이 없다고 소리쳤던 결혼 십 주년 기념일 이후, 급속도로 그에 대한 마음이 식어갔다. 항상 날이 서 있는 그의 눈빛, 나를 극도로 싫어하는 듯한 그의 무시하는 말투. 세탁기에서 나온 빨래를 널 때 나의 속옷이 너무 많아 더럽다고 말하는 남편. 나는 그때부터 남편을 신랑이나 남편이 아닌 '집인간, 집사람 또는 남의 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와의 불화가 시작되는 시점과 동시에 직장 내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이제 회사를 그만두라고 하였지만 나는 오히려 그럴 수 없었다. 내게는 회사에도 부장이 있었지만 집에도 남편이라는 부장이 존재했다. 밖에서도, 집에서도 늘 혼이 났다. 회사에서는 일을 못한다고 혼이 나고, 집에서는 일 때문에 늦고 가정을 돌보지 못한다고 혼이 났다. 늦은 밤까지, 주말까지 일과 가사를 병행해도 나는 늘 부족한 사람이었다. 나의 엄마는 그런 내가 힘듦을 토로해도 커리어 우먼들은 다 그렇게 산다며 내 실력의 부족함을 탓할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에 한 주먹만큼의 삶의 무게가 더해지고, 내 마음은 그만큼 무너져 내려갔다.
남편을 이해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를 너무나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사랑했다.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스스로의 삶을 통제해 왔던 그의 방식은 나를 점점 더 숨 막히게 했다.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점점 심해졌고 그가 한숨을 쉴 때조차 나는 신경안정제를 먹으며 그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드디어 완벽한 번 아웃이 찾아왔다. 나 자신을 찾기 위한 시간들이 시작되었다. 3년 간 홀로 여행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홀로 서는 준비를 했다. 내 인생에 내가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그에 대한 감정이 완전하게 식어 버렸다.
아니, 그때 나는 그가 정말 싫어졌다. 이제는 내가 그를 보면 질색팔색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오히려 그전에 그가 나를 얼마나 싫어했었는지를 눈치채게 되었다. 그래, 그렇게 싫어했으니 그런 눈빛, 그런 폭언이 나오지. 내가 얼마나 눈치가 없었으면,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으면.
그는 아마 놀랍기도,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순종적이며 그의 말에 벌벌 떨던 내가, 그가 소리치는 차 안에서 대시보드에 머리를 박고 괴성을 지르며 자해를 했으니까. 그가 날 선 눈빛을 하면 같이 악다구니를 쓰며 덤볐으니까. 그것이 맞는 방식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그렇게 싸우는 방법밖에 알지 못했다. 나는 나의 부모가 그렇게 싸워왔던 유년을 보냈기 때문에.
K가 드디어 내게 먼저 부부 상담을 제안했다. 몇 년간 정신과 상담을 열심히 받던 내가 계속 상담을 요구할 때에는 절대 거부하던 그였는데. 나는 뻔한 결과를 예상했지만 그의 요구를 따랐다. MBTI검사를 받으니 역시 내가 생각했던 성향이 그대로 나왔다. 나와 남편의 성향은 한 마디로 ‘님아, 그 강을 왜 건너려 하오’였다. 서로가 극과 극으로 맞지 않았다. 상담이 끝났을 때조차 상담 선생님은 내게 ‘모든 사람이 이혼을 하지 않고 끝까지 다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배운 님은 다시 내게 상담을 받으러 올 지도 모른다.’라고 했다. 내 마음은 이미 그때 완전히 끝난 상태였다.
어쨌든 상담에 소기의 성과는 있었다. 그는 각성을 했다. 내게 소리치고 윽박지르고 날 선 눈빛을 하는 것이 정상적인 시선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매일 밤 자기 전에 오늘 하루는 화를 내지 않았는지를 돌아보라는 숙제를 받았고, 과연 모범생답게 그것을 충실히 이행했다. 감정을 컨트롤하기 위한 책을 읽고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늘 자만하며 농담을 섞어 말하지만 나는 그를 정말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 후 2년이 넘게 우리는 이혼을 하지 못했다. 나는 살기 위해 헤어진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그에게 이혼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마침내 그가 이혼을 결심하고 숙려 기간이 시작되자, 우리에게는 오히려 평안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에게 고마워할 줄도 알고, 그에게 농담을 걸 줄도 알게 되었다. 서로 간의 거리가 생긴 우리는 아들과 저녁을 먹으며 농담을 주고받고 큰 소리로 웃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왜 이혼을 하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이혼이라는 경계와 같은 다리가 그와 나의 사이에 놓임으로써 진정한 합의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를 한 인간으로 이해하고 그의 삶을 존중한다. 그리고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을 망쳤다고 원망할 필요도 없어졌다. 우리는 성공적인 양육을 위한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진실한 친구 관계가 되었다.
나는 그에게 사랑을 요구하지도, 전적으로 의지하지도 않지만 인생의 중요한 부분에서 조언을 구한다. 그는 내게 사랑을 주지 않지만 나의 칭얼거리거나 징징대는 것에서 해방되었고 일정 부분 자유로워졌다.
K는 그간 보호자로서 통제자로서 어린아이 같은 내 삶의 일정 부분을 감당해 내야만 했다. 늘 사고 치고, 문제 해결 능력도 떨어지고, 현실 감각이라고는 없이 감정 기복이 심한 나를 여동생처럼, 때로는 아빠처럼 돌보아 준 것을 인정한다. 나는 그런 보호가 숨 막히다고 떼를 쓰는 어른아이에 불과했었다. 집안의 막내이면서도 모든 가족의 상담소와 대소사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그런 그를 이해하기 때문에 이제 그에게도 평안을 주고 싶다.
또한 그가 내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혼으로 나를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혼의 과정과 동시에 팔이 마비되는 커다란 사고를 겪었다. 회사도 그만두고 악재가 겹쳤다.
바닥을 치고 나면 좋은 일이 있다는 사주팔자 풀이 같은 일들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바닥이 있으면 지하가 있었다. 그리고 지하에서 내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고 나를 구원해 주리라는 믿음 따위는 가질 필요도 없었다. 진정한 구원은 바로 나 자신의 변화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준비를 시작해야만 했다.
“네 눈앞에 일어난 일은 네가 치우고 살면 돼.”
어느 날 내가 존경하고 애정하는 작가 언니가 내게 해 준 말이었다. 요즘 그 말을 새삼스레 자주 되새기고 있다. 나로부터의 구원, 그것은 내가 나를 책임질 때 일어날 수 있는 변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하는 당일까지도 주저한 것은 사실이었다. 조금은 민망한 법정 출석이 끝난 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렇게 하기 싫어했지만 막상 하고 나니 후련하지?”
그는 나의 말에 허탈한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그동안 나와 살아주느라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동안 고생했어. 나의 통제자. 나의 보호자. 내가 사랑했었던 진실하고 속 깊은 남자야.'
이제야 그와 나 사이에 진짜 우정이 시작된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