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서 내 앞에 놓였던 여러 갈래길 가운데 내가 잘못했거나 선택하지 않았던 가장 나빴던 것만이 떨어져 나와, 그것들이 다시 이 생에서 생성되어 놓친 일들을 다 겪고, 다 아프고 다 갚고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돌이켜보면 하루라도 떠올리지 않은 날이 있었을까.
그 시절의 차가운 온도를,
무거운 공기를,
적막하게 가라앉는 분위기를,
말 없는 한숨을 짊어진 굽은 등을,
분노에 차서 서로를 노려보는 눈초리를.
그것들은 그대로 내 몸과 마음에 온전히 각인되어 살면서 기대고 의지할 곳을 내어주지 않았다.
나는 생에서 넘어질 때마다 잡아줄 곳이 없음을 원망하고 또 슬퍼하고 분노했다. 나는 불행의 씨앗이라고. 다시 힘든 일이 생기면 절대 일어서지 못할 거라고.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살아왔다. 살아내졌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 그렇게 만들었다.
폭력과 고성으로 점철된 유년에서,
비난과 폭언으로 이어진 사춘기에서,
무시와 인격모독이 난무했던 조직에서.
실제로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행이 송두리째 인생의 전부라고 착각하게 만든 우울의 기억에서.
그러나 나는 마침내 예쁜 것들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 인생은 그동안 쌍두마차를 타고 달렸다. 서로 절대 양립할 수 없는 두 말이 나를 태우고 끌었다 날았다 쓰러졌다를 반복했다. 불행의 말은 절대 옆을 볼 수 없게 시야를 완벽히 가린 채, 행복이란 말의 뒤꽁무니만 쳐다보며 전력으로 질주했다. 그것도 그는 나를 자신의 발 밑에 질질 끌고 가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불행의 말이 지쳐 가는 것을 느끼면 나는 그제야 소스라치게 놀라며 바닥을 발로 차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불행의 말 위에 겨우 올라타자 나 또한 겨우 행복이란 말의 엉덩이가 보였고, 나는 간신히 그 말 꼬리를 잡았다.
행복의 말은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때때로 자신의 등에 나를 태워주기도 하여, 나는 비로소 하늘과 빛을 바라보는 기이한 경험도 하였다. 그런데 그 경험을 하고 나면 간사한 인간은 다시는 불행의 말을 타고 싶지 않은 법이다.
불행의 말도 그동안 애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실은 그 말은 자신의 이름이 불행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행복의 말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지와 소망으로 뛰었을 뿐이다. 누가 옆에서 불행의 말의 시야를 가리게 한 '현실'이라는 검은 눈가리개를 떼어내 주기만 했더라도 그는 자신의 이름을 개명했을 수도 있다.
불행의 말은 아무리 세게 달려도 결코 행복의 말을 따라잡지 못한다. 설령 그가 행복의 말을 앞질렀다고 느낄 때에도 하늘을 올려다보면 행복의 말은 심지어 그 위에서 날고 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실은 행복과 불행의 말을 태우는 주체는 이 '불안'이라는 녀석이다. 행복의 말에 타서 일시적으로 막 날고 있을 때조차도 역시 그 불안이 존재했다. '너는 다시 떨어지고 말 거야! 너 자신의 유약함, 나약함이 너를 그렇게 만들 거야!' 결국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바퀴벌레 같은 그 불안이란 놈을 잡아야만 했다. 니체가 말했듯 나는 그 불안에게 되뇐다. "부서져라! 부서져 버려라! 나는 너에게 관심이 없다! 너는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오른손이 마비되고 갑작스러운 퇴사를 하게 됨과 동시에 바로 콧구멍밑까지 현실이 들이닥쳤다.
결국 나는 남편과의 이별이 결국 내 뼈마디와 맞바꾼 셈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회사 밖은 지옥이라 말하지만 결국 그것도 막연함에서 오는 불안감일 뿐이다. 만약 원래 지옥에서 살던 사람이라면 그것이 지옥임을 인식할 수 있었을까? 사실 전쟁도, 지옥도, 경험치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마음가짐이 그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프고, 많은 것을 겪고, 현실에 부딪히며 어렴풋이 생을 알아 간다.
내가 다 짊어졌던 것만 같은 부분도 다른 측면에서 보면 실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기대며 이겨 냈었다.
내 삶에 피해를 줬다고 원망한 사람이 있었으나,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사람이었을 터.
크고 작은 경험을 통해 모든 것은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나 또한 내가 갇힌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다른 각도로 넓고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이 충만한 유년의 기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쩐지 이미 기득권에 속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내가 경험하고 몸소 체득해야만 했고 그런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늘 부러워했다. 그러나 내게 일어난 일의 일부는 나의 기질적인 특성과 틀에 갇힌 생각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남 탓을 할 필요는 없다.
만약 내게 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감히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 언저리에나 가 닿을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다시 나는 기질적 특성으로 인해 자신을 채찍질하고 질주하며 살았을 것이고, 나와 척을 진 모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힐난하며 나를 옹호하는 자들만이 옳고 정의롭다는 착각 속에 늙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정말이지 끔찍해진다. (틀니를 낀 채 주름으로 잔뜩 늘어지고 처진 눈을 모든 근육을 다 사용해 씨근덕거리며 남을 비난하고 있는 할머니를 상상해 보라. 생각만 해도 다행이지 싶다.)
그리고 최소한 내가 겪은 일을 대물림하지 않을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래서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또한 감사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진 모든 단점을 다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살면서 또 나와 대척점에 있는 사람을 만날 때 예의 그 편향적인 독설로 그를 찍어내려 할 수도, 또는 도저히 나의 그릇에 담지 못할 수도 있다.
전 남편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가도 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쉬이 용서되지 않는 과거가 둥실 떠오르고 만다. 나도 분명 잘못한 것이 있음을 알지만.
그러나 적어도 이전처럼 무조건 '나의 편을 들지 않는 저 이는 나빠. 고쳐야 할 사람이야.'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살아온 만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해 버린다. 아직 젊거나, 경험치가 적거나,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을수록 그런 일은 비일비재할 것이다. 나 또한 내가 선택힐 수 없었던 가족 안에서의 슬펐던 서사와 같은 과거의 경험에 의해 아직 나의 발목을 잡히는 부분도 있기에.
그러나 누군가가 말했듯 '나무의 성장은 그의 나이테의 숫자와 비례한다'라고 하였나.
어떤 일이 닥치고 그 문제를 내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야에 한정하지 않고 오히려 외부의 시선에서 내 안의 문제를 조금 멀리 떨어져 바라보게 되었을 때, 내게 일어난 것은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고 나의 문제도 결국엔 일어났어야 할 일로 보인다. 그나마 이제라도 먼저 일어나 버려서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에서 나는 모든 일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아울러, 격하게 현실에 구르고 삶을 책임진다는 것에 대한 무게를 느낀다. 내가 본보기를 보여야 할 후대의 젊고 어린아이의 세계에 대해 생각한다.
언제나 나는, 아들에게 나라는 존재가 살면서 힘든 일이 닥칠 때 언제라도 찾아와 쉬어갈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이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애쓰며 살지 마. 그저 물처럼 흐르듯이 살아.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놓아버릴 줄도 알아야 해. 내 안에 담을 수 없는 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닌 것이야. 너라는 집은 너 자신이 지켜.'
삶이란 내가 살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현타(현실을 자각하는 타임)는 현자가 되어 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라는 만 겹의 책장을 하나씩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