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해서, 별과 별 사이의 간격이 별 하나의 크기에 비하여 너무 멀기 때문에 은하의 충돌 과정에서 별들이 서로 충돌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하의 전체적 모양에는 큰 변화가 온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Ch.10 영원의 벼랑 끝 중에서 -
일주일이면 끝날 줄 알았던 병동 생활이 길어지고, 눈을 들어 보니 어느새 밖은 12월이 되어 있었다.
나의 인생을 우주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 나는 책 코스모스에 나오는 대로 중년기에 들어선 '착실하고 건실한 은하’여야 하는데, 하루아침에 우주의 역사에서 가장 큰 변동을 겪고 있는 젊은 비운(?)의 은하가 되어버렸다. 회춘했다고 만세라도 외치며 뜻하지 않게 들이닥친 이 불행과 격한 하이파이브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단 하루라도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지 않으려 했다.
그저 꾸준히 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가며 영어 단어장 속에 머리를 파묻어버리고 모니터 속의 글자 한 자 한 자에 집중해 나가며, 나는 그렇게 한 글자를 정성스럽게 타이핑하듯이 하루를 살았다. 다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꿈을 꾸었다.
오늘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의 꼭지들은 언젠가는 꽃망울이 되어 나를 살포시 일으켜 주리라. 이 거친 사십 대의 바람과 같은 사춘기도 멎게 되고 나는 새로운 멋진 인간으로 다시 일어서겠지.
그 행복한 꿈이 바람이 되어 아침 출근길은 늘 회사에 늘 1등으로 도착하리만큼 상쾌했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자고 일어나니 담이 베긴 듯 어깨가 쑤셨다. 또 잠을 잘못 잔 것일까. 나는 늘 그렇듯 자주 가는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았다. 당일 저녁이 되었지만 팔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뻐근했다. 이렇게 아플 수가 없다 생각하며 주말 야간 진료를 하는 정형외과를 찾았다.
엑스레이 촬영 결과 10년 만에 나의 목에 디스크가 재발했다. 역시나 또… 한숨이 나왔지만 목에 주사를 맞고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밤새 팔이 빠질 듯한 통증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병원에서 준 3일 치 약을 하룻밤 사이에 다 먹고 말았다. 다음 날 저녁에도 병원에 가서 초음파를 보고 염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번에는 팔에 주사를 맞았지만 역시나 통증은 가시지 않았다. 이틀 연속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으니 피곤으로 거의 녹초가 되었다. 하지만 입사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아 이른바 ‘연차 거지’ 였기에 휴가를 내기에는 눈치가 보였다. 이튿날 출근해서는 거의 벌서는 것처럼 한 팔을 하루 종일 만세를 부르는 자세로 들고 있었다. 그것을 본 동료 직원 중 한 명이 우리 회사에 보건 휴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수요일에 출근하자마자 보건 휴가를 내고 나름 관절로 유명한 우리 구의 센터 병원을 찾았다. MRI를 찍은 결과 목디스크가 파열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의사는 이런 경우가 흔하다며 약물 주사 및 통원 치료를 권했고 나도 크게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튿날에도 통증은 심했지만 입사 후 회사에서 소위 숙원 사업이라고 말하는 큰 과제를 하나 맡고 있었기에 꼭 출근을 하고 싶었다. 거기다 추가로 파트장이 내게 '이제 큰 프로젝트를 하나 같이 해 보자.'라고 권했기에 나는 기대와 동시에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상태였다. 급한 대로 비행기를 탈 때 주로 쓰는 목 베개를 목에 두른 채로 출근길에 나섰다.
그런데 하필이면 고장이 잦은 우리 집 현관 등이 또 말썽이었다. 어두컴컴하여 신발을 찾을 수 없었다. 남편에게 몇 번이나 고쳐 달라고 말했지만 그냥 둔 것에 짜증을 내며 겨우 신발을 찾아 신고 서둘러 나섰지만 눈앞에서 매일 타는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다음 버스를 탔다. 한 박자 늦었을 뿐인데 앉을자리도 없이 북새통이었고, 나는 아픈 오른팔을 붙잡은 채 서서 가게 되었다.
겨우 두 정거장쯤 지났을까. 갑자기 버스가 쿵 하는 소리를 내며 크게 부딪혔다. 앞의 노란 학원차를 뒤에서 정면으로 들이받은 것이었다. 두 버스는 커다란 굉음을 내며 앞으로 밀려나갔고 탑승객들 또한 같이 심하게 쏠렸다. 나는 디스크가 파열된 목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에 방어적으로 아픈 오른 팔로 좌석 시트를 잡았다.
끼익.. 소리를 내며 버스가 급하게 멈춰 섰고 그와 동시에 내 팔에서는 후드드득... 하고 뭔가가 미세하게 끊어지며 흩어지는 느낌이 있었다.
그때부터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가늘고 긴 쇠창살 하나가 목 뒤에서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고통이었다.
목베개를 한 채 울고 서있는 나를 보고 한 고마운 승객이 자리를 내어 주었다. 나는 회사에 바로 알리고 출근을 하지 않은 채 곧장 울며 병원에 갔다. 그때는 제대로 서 있을 수 조차 없어 거의 절뚝이며 걷는 상태였다. 아침 8시에 병원에 갔지만 담당 주치의가 오후 진료이고 다른 의사들도 예약이 가득 찼다고 하여 나는 하는 수 없이 검사를 마친 채 훌쩍대며 오후 2시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내 상태를 보더니 이렇게 되면 수술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나는 TV나 SNS에서 디스크는 후유증 때문에 어지간하면 수술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본 적이 있어 안 하는 방법은 없는지 물었다. 의사는 이러한 경우 통원으로 한 달 안에 낫는 경우는 10% 미만이며 그 고통을 감수하느니 수술을 하는 게 낫고, 후유증이 생기는 경우도 0.5% 미만이며 본인의 20년 경력에 후유증이 생긴 환자는 2명밖에 없었던 데다 그런 경우도 본인의 환자는 아니었다고 했다.
주치의는 내게 수술은 일주일 후 정도 여유 있게 하면 어떠냐고 했지만 나는 우선 극심한 통증을 참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회사에 빨리 출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어서 해야만 한다면 빨리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의사는 그러면 바로 다음 날 수술을 하면 어떻겠냐고 했고 나는 생각보다 빠른 것 같았지만 그러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당일 준비도 못한 채 입원을 하게 되었고 병원에 통합 간병 시스템 때문에 홀로 병동에 남고 다음 날 아침 7시에 수술을 하게 되었다.
미국의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나의 언니와 통화를 하니 수술 시 앞으로 구멍을 내는지 뒤로 하는 시술인 지를 물어보라고 했다. 담당 간호사에게 물으니 처음에는 뒤로 한다고 했다가 다시 물어보니 앞으로 구멍을 낼 것이라고 했다. 언니가 말한 대로 안전한 시술 방법을 택한다고 하여 안심이었다.
전신 마취를 하고 수술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른 뒤 세차게 나를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깨어남과 동시에 팔이 불타는 듯이 아팠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마취에 완전히 깨지 않은 나는 팔이 뽑힐 것만 같다며 수술 전보다 아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바로 2차 수술을 해야 한다며 다시 수술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 시간 반 정도면 끝난다는 수술이 2차 수술로 이어지고, 내가 정신이 들어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저녁 7시가 되어 있었다. 혼미한 정신에서 눕지도 앉지도 못한 채 자다 깨다를 반복하였다.
그때부터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이. 수술이 앞이 아닌 목 뒤로 한 것을 안 것도 그 이후였다.
마음 좋은 나의 주치의는 밤새 한 시간을 멀다 하고 종종 빠른 걸음으로 내 병실 문을 벌컥벌컥 열고 다른 의사와 함께 들어왔다. 나는 그때마다 깨어있었는데 그런 내게 주치의는 황급히 몸 여기저기를 움직여 보라고 했다. 그러더니 그는 내 상태를 볼 때마다 한숨을 쉬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쥐어뜯기를 반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