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도 초록이었다.
봄비에 씻기고 여름 햇살에 물들며
새들이 내려와 노래를 퍼뜨리던 시절,
내 뿌리는 땅 속 깊이,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나를 깎아내렸다.
잎은 하나둘 떨어지고,
내 몸은 점점 거칠어지며
이제는 쭈그린 등처럼 굽어간다.
누구도 더 이상 나를 올려다보지 않고,
그늘도, 열매도 없는 나를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칠 뿐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 속의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내가 버틴 시간들이 뿌리 아래로
비밀스러운 생명을 길러왔음을.
나를 스쳐 간 모든 새들과 바람과 비는
어디론가 떠났지만,
내가 남긴 흔적은 바람 속에 퍼져
다른 곳에서 새 나무를 키우고 있다.
이제는 서둘러 뭔가를 이루려 하지 않는다.
그저 늦가을의 고요처럼
이 순간을 받아들일 뿐이다.
비록 나뭇잎 하나 남아 있지 않아도,
겨울 속에서도 나는 살아 있다.
누군가는 내게 다가와
이마를 기대며 쉴지도 모른다.
“아, 여기 나무가 있었구나.”
한마디 남기고 떠나더라도,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쓰러지지 않는다.
시간이 나를 비우고 깎아내린다 해도
땅 아래 뿌리로, 바람 속 씨앗으로
다시 어디론가 뻗어가리라.
그렇게 나는 나무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