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늦깎이

반려견 예방접종

by 예일맨

땅콩이도 이제 어엿한 "관리받는" 강아지가 되었으니 꼭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백신 접종입니다. 5개월이면 이미 우리나라에서 실시하는 기본 접종을 모두 완료해야 하는 월령인데, 땅콩이는 이제 막 시작했습니다. 좀 늦었지요…


도우미견 나눔센터에서 DHPPL 종합백신, 코로나 장염 백신, 켄넬코프 백신을 모두 2번씩 접종하고 광견병 백신도 맞고 왔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종합백신 3번과 인플루엔자 백신 1번뿐입니다.


2차 접종 날로부터 딱 2주 되는 날에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이것저것 한다고 못 가서 며칠 늦었습니다. 땅콩이는 가뜩이나 늦깎이인데 백신 졸업식이 더 뒤로 미뤄졌습니다.


아이가 목요일마다 가는 저녁 논술수업에 급히 데려다주고,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동물병원으로 향합니다. 반려동물에게 있어 동물병원은 아주 무섭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곳이라고 하니 땅콩이에겐 병원의 "ㅂ"자도 꺼내지 않습니다.


이제 낯선 환경에서 살게 된 지 3주도 되지 않았고, 역 쪽으로는 가보지도 않았으니 땅콩이에게는 그저 낯설고 신기한 길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예상하지도 못한 채 여기저기 재미있게 냄새를 맡으며 느긋하게 걷습니다.


사람도 많고 복잡한 시내로 접어드니 더 이상 긴 목줄을 늘어뜨려 끌고 갈 수 없어서 땅콩이를 번쩍 안습니다. 그리고 저벅저벅 빠르게 걸어서 툭 튀어나온 특이한 사각 장애물 두 개를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갑니다.


갑자기 생소한 공간에 이끌려 들어온 땅콩이는 이게 무슨 영문인지, 이곳은 어디인지 상황 파악을 할 새도 없이 수의사 선생님을 만납니다. 저녁 7시. 진료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좀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진료실 안에 혼자 앉아계십니다. 밖에서도 들여다보일 정도로 문을 활짝 열고서…


땅콩이는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하고 앞으로 자주 보게 될 무서운 사람을 맞바로 직면하게 됩니다. 저도 얼굴 마주치기 무섭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선생님 말씀에 살짝 당황을 합니다.


'작은 동물병원이지만 처음이니까, 접수를 하고 의자에 조금이라도 앉아있다가 부르면 들어가겠지?' 저도 반려견 보호자로 가는 것은 처음이라 어떻게 진료를 볼까 머릿 속으로 상상했는데 역시 사람 병원과는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진료실 안에서 접수를 하고 내원한 이유를 말하니 선생님은 지체하지 않고 땅콩이를 데리고 처치실로 들어가십니다. 혼자서도 잘하십니다. 그리고 백신을 꺼내기가 무섭게 후딱 백신을 주사하시고 발바닥 털과 발톱을 정리해 주십니다.


역시 예상대로 땅콩이는 긴장하고 있지만 능숙하고 재빠른 솜씨에 넋이 나간 듯 몸을 맡깁니다. 수의사 선생님은 땅콩이 못지 않은 저의 어설픔도 눈치를 채셨는지 처음 강아지를 키우냐고 물으시며 이것저것 필요한 부분을 친절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늦은 시간이라 조금 걱정했었는데,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빨리 끝났습니다. 게다가 대기시간이 1초도 안되었으니 이 속도는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용을 계산하고 나서 혹시 백신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니 대기석에 잠깐 앉았습니다. 이 병원에도 의자가 있었습니다. 네 개나…


자유롭게 풀어놓으셔도 좋다는 선생님 말씀에 목줄을 하지 않고 땅콩이를 병원 바닥에 내려놓습니다. 조금 냄새를 맡으며 탐색을 하고 그 사이 내원한 강아지에게 관심을 보이더니 이내 제가 앉아있는 의자 아래로 들어가 숨습니다.


다른 의자로 옮겨 앉아보니 땅콩이도 따라옵니다. 그리고 그 의자 아래에 또 웅크리고 앉습니다. 저보다 더 무서운 남자가 안에 떡 하니 버티고 있어서 그런 건지… 그래도 2주를 넘게 봤다고 의지할 사람이 저밖에 없어 그런 건지… 저를 따라오는 것이 기분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15분 정도가 지났습니다. 의자 밑에 있는 땅콩이를 조심스럽게 꺼냅니다. 그리고 목줄을 채우고 문을 나섭니다. 그제서야 땅콩이의 후련함이 느껴집니다. 그는 올 때처럼 바닥을 코로 훑으며 천천히 걸어갑니다. 걷는 모습은 똑같지만 왠지 달라 보입니다.


아직 겁도 많고 낯선 사람(특히 남자)을 두려워하는 땅콩이지만 어른 개들도 힘들어한다는 동물병원에서 씩씩하게 주사맞는 모습을 보니, 아가여도 역시 수컷은 수컷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하루가 다르게 목소리도 커지고 표현도 확실해지는 땅콩이를 봅니다. 앞으로 더 많이 자라서 두려운 동물병원에서도 숨어만 있는 게 아니라 멋지게 코를 들이밀며 활보할 땅콩이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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