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부세모 Jan 05. 2022

그림자 놀이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딴짓을 합니다 -3

어젠 비가 와서, 수영장에 갔다.

비가 추욱 내리는 날, 수영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그리워서다. 그 길에는 늘 물의 감각이 따라와서 꼭 물 속에서 노는 느낌이랄까. 가끔 시원한 빗소리를 따라, 추억들도 떠오른다. 어릴 적 집 앞마당 대야에 앉아 동생이랑 발가벗은 채 첨벙대던 물놀이라든지, 바다에서 친구들과 옷이 흠뻑 젖을만큼 했던 물장난이라든지. 기억을 따라, 건조했던 마음도 잠시 촉촉해진다. 습한 공기와 비 비린내가 몸에 달라붙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지난 주말, 친구부부 H와 B의 집에서 그 둘과 술을 마시던 날이었다. 한 살 배기 아이가 방에서 자고 있어 우리는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건배를 했다. 건배.

술을 넘기며 B가 말했다.  “요즘은 새벽에 아이가 깨면, 그림자 놀이를 해.”

B는 H만이라도 잠에서 깨지 않길 바라며 아이와 조용히 노는 법을 찾다가 그림자 놀이를 하게 됐다고. “생각보다 어려워.” 라며 덧붙였다.

내친김에 성인 셋은 거실 불을 끄고 핸드폰 플레쉬를 켠 다음, 하나씩 만들 줄 아는 걸 뽐냈다. 손이 기억을 더듬어 나비, 여우, 주전자 등을 흉내냈다. 쉬울 줄 알았는 데, 만들 수 있는 게 몇 개 없었다. 하지만 재밌었다.

몇 가진 실패하기도 했지만 계속해서 손을 꼬고 비틀고 겹쳐, 검은 생명체를 창조했다. 편견이 없는 그림자는 여섯 손 뒤로 까만 면과 움직임만 남겼다.

어둠을 밝히는 빛 속에서 움직이는 손은 다시 어둠이 되어, 커졌다 작아졌고 사라졌다 나타났다. 드리워진 그늘은선명하고 아름다웠다. 본래 서른 개의 손가락은 아름다웠다. 우리는 비둘기가 되어 날았고, 찌그러진 안경으로도 변했다. 통통한 꽃게는 사선으로 걸었고, 여우를 닮은 개는 소리없이 짖었다.

‘왈,왈!’


수영복으로 갈아 입은 뒤, 수영을 하기 전에 풀에 깊숙이 잠수해 본다.

공간을 울리는 소음들이 사라지고 고요하다. 일 이 삼 .. 내 몸둥아리의 70프로가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또 30프로는 고체 기체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물 밖에서 중요했던 생각들도 근원을 모르는 불안감도 잠시 놓고, 침을 삼킨다.

숨이 옅어질 때 쯤 얼굴을 밖으로 내밀고 동시에 공기를 크게 들이 마신 후 내뿜었다. ㅍ-하 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몸을 풀고 사뿐히 점프해 두 발로 벽을 툭 밀어내며 수영을 시작했다. 25m 레일을 왔다 갔다 반복하는 동안, 수영장 물은 마치 그림자 놀이처럼 내 윤곽을 말랑하게 감싸며 움직인다.


오늘 밤엔 욕조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인다.

차가운 타일벽에는 떠도는 수증기가 붙어 방울들이 맺혔다. 나른하게 몸을 늘어뜨린 채 이상한 생각을 했다. 물은 그림자일까 빛일까.

당신과 나, 우리는 길을 걷는 동안 들쑥날쑥한 가로수와 건물의 그늘들을 스친다. 더운날에는 질긴 햇살을 피해 스스로 그림자를 잠시 지우기도 하면서. 하지만 가던 길을 쉴 뿐, 멈출 수 없다. 공원을 산책할 때면 살아있는 그림자들을 만난다. 나무가 겹겹이 쌓인 그늘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하고, 종종 공원에 나온 또 다른 사람들과 그림자가 겹쳐지기도 한다. 그렇게 빛과 그림자에 감싸이면서 우리는 본래 모습을 다시 찾는 것 아닐까?


체온이 슬슬 오르고 얼굴에 땀방울이 맺힌다.


<이 글은 은유글쓰기 모임에서 물에 대해 썼던 글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와 나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