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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Apr 16. 2024

농사는 아이들이 짓습니다

청명, 씨앗을 심고 싹 틀 날을 기다립니다

잎보다 먼저 피는 꽃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 가고, 바야흐로 초록의 계절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버드나무 가지 잘라 불던 버들피리를 올해는 아직 만들어 보지도 못했는데 이 봄은 이렇게 시나브로 가버릴 모양입니다. 철쭉 사이에 하얗게 핀 조팝나무 꽃을 보며 아이들에게 씌워 주었던 화관이 생각납니다. 나비는 꽃관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의 고운 웃음에 날아와 앉을 것 같습니다.


방과 후 아이들은 제법 큰 텃밭을 가진 부농입니다. 아니, 밭주인은 아니니 소작농이라고 해야 하나요. 모둠을 짜고, 각기 구역을 맡아 밭을 갈고 마음에 드는 작물의 씨앗을 뿌렸답니다. 춘분에 심은 감자는 검정 비닐 사이를 뚫고 싹을 내밀었으니, 씨앗을 아직 뿌리지 못한 농부들은 마음이 바쁩니다.

부추, 대파, 시금치, 상추. 올해 3학년 아이들이 도전하는 작물입니다. 씨앗도 뿌리지 않은 밭에서 아이들은 이미 넘치는 풍작을 예감합니다. 글쓰기 공책에 상상의 식탁을 차리고 자기들이 수확한 작물로 갖은 요리들을 차려 보고 있네요. 싱싱한 채소를 팔아 큰돈을 벌어보겠다는 야무진 꿈도 꾸어보고요.


내가 키우고 싶은 농작물은 부추다. 왜냐하면 할머니가 해주신 부추전이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추는 잘게 썰어서 간장도 만들 수 있다. 급식에서도 비빔밥 나올 때 함께 나왔다. ... 부추가 다 자라면 부추전을 해서 먹고 싶다. 부추전을 부추간장에 찍어서 먹으면 더 맛있을 것 같다. 내가 키운 부추라 더 맛있을 것 같다. .... (예설)

내가 키우고 싶은 채소는 시금치다. 왜냐하면 키우기 쉬울 것 같고 맛있기 때문이다. ... 내가 심은 이유는 졸업여행 갈 때 돈을 벌어야 해서 그렇다. ... 시금치로 만든 음식을 만들어 본 적이 없다. 시금치나물의 냄새는 참기름 냄새가 많이 났다. 나는 시금치로 시금치나물을 만들 것이다. ... (수현)

... 대파는 쪽파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큽니다. 대파는 떡국, 콩나물국, 곰국 등 여러 가지 국에 들어갑니다. 저는 파가 초록색부터 나오면서 점점 커질 것 같습니다. 파가 무럭무럭 자라서 싱싱하면 좋겠습니다... (주연)

... 이유는 요리에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는 과자에도 들어 있고, 떡국에도 들어 있다. 콩나물국에도 들어 있다. ... 할아버지를 만나면 할아버지가 나한테 파 과자를 준다. 파 과자는 파 반죽으로 된 크래커 위에 김 가루가 뿌려져 있다... (우현)

제가 키우고 싶은 채소는 시금치이다. 왜냐하면 시금치나물을 먹었는데 맛없지는 않아서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다. 또 내가 초록색도 좋아하는데 시금치가 초록색이다. 시금치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상추랑 비슷할 것 같다. 그리고 그냥 먹어도 맛있을 것 같고 수확할 때 재미있을 것 같다. 또 수확한 거를 팔아서 돈을 벌어서 졸업여행을 가고 이번 주 목요일에 씨앗이 나면 좋겠다.(승연)

상추는 맛있고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도 들어가서 키우고 싶다. 계수 달팽이에게도 상추를 주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상추는 끝이 꼬불꼬불하다. 책에서 봤는데 아이들이 상추를 심었다. 하루가 지나니 상추가 엄청 컸다. ...(세빈)

... 당근으로는 많은 요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당근으로 만든 요리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는 김밥, 당근조림, 잔치국수입니다. 그리고 김밥, 당근조림, 잔치국수는 다 엄마표입니다. 당근은 꼭지만 땅 위로 나와서 먹는 부분은 안 보여서 잘 자라고 있는지 몰라서 물 조절도 잘하고... (수인)

관심을 둔 작물의 종류가 다르고, 심는 시기도 다르고, 표현하는 방법도 달랐지만, 씨앗을 바라보면서 아이들의 기대는 같습니다. 잘 자라리라는 희망입니다. '내가 뿌리는 씨앗은 죽을 거야, 싹이 나오지 않을 거야, 열매를 맺지 못할 거야' 하고 미리 절망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존재 자체로 희망이라는 것이 씨앗과 아이들의 가장 닮은 점입니다.


그뿐인가요,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작물들이 잘 자라는지도 잘 알고 있네요.

... 햇빛이 많이 쬐는 곳에 심어야 되기도 하고 키우는 것도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좋은 말도 많이 해주고 관심을 가져 주면 더 빨리, 더 싱싱하게 자랄 수 있을 것 같다. ... (수인)

... 나는 파를 심은 뒤에 파를 수확할 때까지 좋은 말을 해주고 싶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파가 햇빛을 많이 받아서 초록색으로 잘 자라면 좋겠다. 이유는 잘 자라야지 많이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씨가 뽕 하고 싹이 되면 좋겠다. 어쨌든 빨리 자라면 좋겠다.(우현)

... 파가 저를 좋게 기억하면 더 좋을 것 같고 저를 안 좋게 기억하면 좀 섭섭할 것 같습니다. 파를 4월 15일에 심어서 4월 30일~5월 9일에 나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최대한 빨리 심어서 빨리 나오면 좋아서입니다. 그럼 더 파가 더 맛있어질 것입니다.... (주연)

... 시금치를 키우려면 물, 해, 거름 등 여러 가지 준비물이 필요하다. 시금치가 아주 잘 자라고 아주 크게 자라서 많이 팔고 싶다.(수현)

... 매일은 아니더라도 자주 봐주고 좋은 말 해주고 물도 줄 것이다. 그러면 더 잘 자라고 더 맛이 있어질 것 같다. ... 부추가 조금이라도 안 자라면 내 마음에 애가 탈 것이다. 방학 기간에 다 자랐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걸 가져가서 방학에는 ... 맛있는 부추전을 우리 가족 다 같이 먹을 거다. 같이 먹으면 더 맛있을 것 같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같이 먹을 것이다.(예설)

농작물은 농부들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지요. 좋은 말 해주고, 좋은 기억을 남게 하고, 안 자라면 애태우는 심정으로 밭에 드나들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집니다. 아마 우리 아이들이 키우는 작물들도 이런 농부의 마음을 잘 헤아려 줄 거라고 믿어 봅니다.


작년 청명 절기에 그린 6학년 아이들의 그림에도 꽃들이 화사합니다. 드디어 움직이는 벌레들도 제 모습을 다 드러냈네요.
십 년 전만 해도 천변에서 나들이 나온 뱀을 만나곤 했습니다. 뱀뿐인가요, 너구리, 고라니도 뛰어다녔지요. 십 년 후에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산책길에 만난 이 좋은 벗들을 십 년 후에도 또 만나기를, 아니 나는 세상에 없어도 백 년 후, 천 년 후에도 부디 건재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마침 4월 16일.

그날부터 꼭 십 년이 흘렀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질감과 무게가 달라졌지요. '세월'이라는 이름 때문에 더 먹먹한 십 년의 세월을 보냈을 유가족들뿐 아니라, 그로 인해 직간접적인 상처와 아픔을 가진 모든 분들에게 '기억하고 있다'는 연대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습니다. 내년부터는 그분들의 마음 한쪽에 부디 청명한 빛 한 줄기가 비치는 청명 절기가 되시기를 빌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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