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일기장을 7년째 쓰고 있습니다. 그날 쓸 수 있는 칸은 아주 작지만, 날씨와 큰 사건은 금방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기장을 열어보니 곡우(穀雨) 절기가 시작되는 앞뒤 하루이틀 안에는 꼭 비가 내렸더군요. 많은 양은 아니어도 건조한 기운을 잠깐 달랠 정도로는 뿌려주었습니다. 올해도 곡우 다음날인 지난 토요일, 하루종일 비가 제법 왔지요. 건조해진 피부에 수분크림을 듬뿍 바른 듯, 촉촉했던 주말이었어요.
그런데 곡우 절기는 비가 오는 절기라기보다는 비가 오기를 바라는 절기라고 하네요. 맞아요, 벼농사를 지으려면 논에 물을 대야 하는데 비가 안 오면 큰일이겠지요. 정성스레 심은 씨앗들이 말라 버릴 수도 있고요. 그러니 하늘을 보며 적당한 비가 내려주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시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벼농사라고는 기껏해야 아이들과 붉은 고무통에 지어본 것이 전부입니다. 전 해에 추수하고 방치했던 흙을 뒤집고 물을 가득 담아서 부드럽게 푼 다음, 얻어온 모종을 심었습니다. 제게 벼농사는 봄이 아니라 여름이 접어드는 입하 이후, 아까시 꽃향기 가득한 절기에 모내기로 비로소 시작되었지만, 조상들에게는 곡우 절기부터 본격적인 벼농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볍씨의 싹을 틔우는 '못자리'를 만드는 때였으니까요.
비닐하우스 안에 있던 육묘장에는 가보았어도 못자리 내는 것을 직접 본 적은 없어요. 볍씨를 보호하려고 솔가지로 덮어 두었다고도 하던데, 그것도 책에서만 보았습니다. 나쁜 일을 당한 사람은 못자리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고, 부정 타는 일이 없도록 조심했다고 하니, 심보가 그리 착하지 않은 제가 못자리를 들여다보지 않은 건 볍씨에게 다행이었을까요?
곡우 무렵, 볍씨를 담그는 때에는 부정 타는 일을 몹시 경계했다. 실없는 언행을 삼갔으며, 상을 당한 집에 조문을 가지 않고 혹시 가더라도 집 앞에 불을 질러 죽음의 기운을 사르는 의식을 치렀다. 물론 그런다고 하늘이 비를 내려 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대한 성실하게 임할 뿐이다. [절기서당] 김동철, 송혜경/ 북드라망/ 76쪽
반가운 씨앗비는 볍씨에만 유익한 게 아닙니다. 밭에 뿌렸던 푸성귀들의 목도 축여줍니다. 떡잎이 나왔을 때는 누가 누군지 헷갈립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너는 누구냐?'라고 묻지만, 새초롬한 떡잎들은 초보 농사꾼에게는 대답을 안 해줍니다. 그러나 씨앗비를 충분히 맞은 지금은 각자의 아이덴티티를 숨기지 못하지요. 상추를 시금치로, 시금치를 쑥갓으로, 쑥갓을 치커리로 오해할 시기는 지났거든요. 상추는 상추의 얼굴, 시금치는 시금치의 속도, 치커리는 치커리의 모습으로 당당히 자라납니다.
해바라기 싹은 작아도 어느새 해를 향하고 있습니다. 상자 밭에서 싹을 틔운 어린 새싹들도 점차 자신의 신원을 보여주겠지요.
비를 머금은 매발톱 꽃도 세수를 했으니 고개를 들 테고, 활짝 날개를 편 나비는 꽃 속에 몸을 숨길 수 없습니다.
인디언들은 비가 안 오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렸다지요. 아마 우리 조상들도 곡우 절기에는 그랬을 겁니다. 비를 바라는 마음은 포기할 수가 없는 거니까요. 기우제야말로 가장 간절한 기도의 원형이 아닌가 합니다. 일 년 동안 이런 소망 하나쯤은 품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루어질 때까지 바라기,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하기, 이루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기,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 이루어질 때까지, 이루어질 때까지...!
[또 하나의 달력 / 전례력]
예수부활대축일이 지나고도 교회는 계속 부활 속에 살아간다.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가지각색으로 만난 다양한 부활경험담이 복음으로 선포된다. 상추에게는 상추가 이해할 수 있게, 시금치에게는 시금치가 느낄 수 있게. 각자의 아이덴티티에 맞춤형으로 다가오는 예수를 만난다. 성소주일과 생명주일도 주로 이 시기에 만나게 되기 쉽다.
교회에서는 사제양성을 위한 신학교나 수도자들이 수련하는 수련소를 '못자리'라고도 칭한다. 될성부른 볍씨를 가려내고 건강한 모종으로 키우려면 소금물에 담가져 싹을 틔워야 하듯, 신학교나 수련소에서는 짜고 힘든 과정을 겪게 한다. 삿된 것이 가까이해서도 안 된다. 곡우 절기에 성소주일은 알맞춤하다. 5월 첫 주일을 '생명주일'로 정한 것도 더없이 적합하다. 세상이나 교회나 이 시기는 살아 있는 것들, 살아나야 할 것들을 위해 치달아야 할 때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