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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May 09. 2024

고마워요, 오동나무!

입하, 여름으로 들어서다

명실공히 여름 절기로 접어드는 입하(立夏)가 시작되면서 사흘 동안 내리 비가 왔습니다. 어린이날을 맞아 놀이동산으로, 산과 바다로 놀러 갈 꿈에 부풀었을 어린이들에게는 반갑지 않을 비였겠지만, 비 덕분에 송홧가루도 검털파리도 다 씻겨 내려갔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절기가 바뀌고 며칠 더 볼 줄 알았던 이팝나무 꽃들도 사진 한 장 찍지 못했는데 벌써 떨어져 버렸고, 아직 향기에 취해 보지 못한 아까시 꽃도 나무에 매달린 채 시들어갑니다. 새들이 앉았다 갈 때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청설모의 발길이 닿을 때마다 꽃비가 내립니다. 꽃은 피어서 눈이 즐겁고, 떨어진 덕분에 꽃길을 걷습니다.


이팝나무는 제가 사는 지역의 구목(區木)입니다. 그래서인가 우리 동네에는 이팝나무가 많습니다. 벚꽃이 이른 봄에 한차례 화르르 피었다 지고 나면, 얼마 후 이팝나무 꽃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립니다. 보릿고개를 앞두고 먹을 것이 궁했던 조상들이 이팝나무의 꽃을 보고 소복한 쌀밥(이팝)을 상상한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 꽃이 밥이라면... 저 꽃처럼 소복한 밥 한 공기 배부르게 먹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었을 옛 조상들을 생각하면, 이팝나무 꽃들을 관상용으로만 즐기고 있는 지금의 풍요로움이 괜히 죄스럽습니다.

지금 산에는 흰꽃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꽃송이째 따다가 꽃튀김을 해 먹었던 아까시꽃, 제법 큰 산딸나무 꽃, 종이 달려 있는 것처럼 조롱조롱 매달린 때죽나무 꽃, 매혹적인 향기로 벌들을 초대하는 찔레꽃, 그리고 수국까지. 모양은 다르지만 색상은 비슷합니다. 흰색 꽃잎에 미색이나 연노랑으로 살짝 포인트를 준 모습이 온통 초록인 세상에서 독특하게 개성을 살린 '꾸안꾸' 미인들 같습니다.


햇볕은 고와요 하얀 햇볕은
나뭇잎에 들어가면 초록이 되고
봉오리에 들어가면 꽃빛이 되고
열매 속에 들어가면 빨강이 되어요

햇볕은 따스해요 맑은 햇볕은
온 세상을 골고루 안아줍니다
우리도 가슴에 해를 안고서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되어요 (이원수 시/ 백창우 곡)


아이들과 함께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봅니다. 광합성이니, 엽록소니 하는 학문적 용어보다는 우리말로 만든 노래를 부르고 들을 때 생명의 본질에 더 가까이 가는 느낌입니다. 앞으로는 본격적으로 해님의 계절이 올 테고, 해님의 열정에 노출되면 될수록 땀을 쏟겠지만, 지금은 아직은 곱고 따스한 해님이 이루는 일들을 관조하며 걷기로 합니다.


흰꽃들을 보며 걷다가 송이째 떨어진 연보랏빛 오동나무 꽃을 만났습니다. 오동나무는 우리 뒷산에는 흔치 않은 나무입니다. 비스듬히 서 있는 오동나무의 꼭대기를 눈으로 따라가 봅니다. 오동나무는 햇빛을 받기 위해 방향을 바꿔가며 치열하게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른 나무들의 우듬지를 지나 비로소 가지를 치기 시작한 오동나무는 햇볕을 한껏 받을 수 있는 곳에 다다라서야 꽃을 피웠습니다.

햇볕을 받기 위해서 위로만 쭉쭉 뻗은 오동나무는 왠지 굉장히 외로웠을 것 같아요.

소나무 숲인 이곳에서 오동나무는 어떻게 혼자 시작하게 되었을까, 햇볕을 찾아 옆을 보지 않고 위로만 자랐던 세월은 몇 해나 될까. 온통 오동나무 생각에 빠져 있는데, 세상에나! 줄기 구멍에서 동고비가 포르르 날아 나오네요. 둥지가 너무 높아 그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어쩌면 그 안에서 육추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나무가 그 나무려니, 무심히 지나쳐 버릴 수도 있었지만 떨어진 꽃송이를 바라봐주었다고 오동나무가 제게 살며시 건네준 선물 같았습니다.

멀리서 뻐꾸기 소리가 들려오고, 오동나무 꽃잎은 떨어지고, 동고비는 새끼를 키우고, 나뭇잎들은 햇빛을 받고, 고라니는 언제 다녀갔는지 동글동글한 흔적을 남겨 놓고...

농사를 짓지 않는 저의 입하는 참으로 한가롭고 여유로운 절기입니다. 이러다 추운 겨울에 배고파하는 베짱이가 되는 건 아닌지. 그래도 지금은 그 걱정마저 잠시 미뤄두렵니다. 오늘은 햇볕도, 바람도 너무 좋아서요.


[또 하나의 달력/ 전례력]

부활시기가 지나고 나면 주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 대축일이 다가온다. 성령 강림 축일을 지내고 나면 연중시기다. 성령은 불, 물, 비둘기, 혀 등으로 상징되는데, 내 식으로 표현하면 성령은 해님처럼 타오르는 붉은 여름이자, 다른 날과 구별하기 어려운 나뭇잎색 일상이다. 실제로 연중시기의 제의도 초록빛이다. 며칠 안 되는 특별한 축일에 대한 기다림과 기억을 밑천 삼아 지루하고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게 인생이다. 치열한 여름을  버티는 것이 중요하다. 하늘을 향해, 해님을 향해 가기 위해 좌고우면하지 않는 오동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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