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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May 16. 2024

숨어 핀 감꽃이 참 예뻐요

입하, 작은 땅에 모종을 심었습니다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저는 들길을 지나 학교에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 옆에 매끈하고 토실하게 잘 익은 보랏빛 가지 두 개가 열려 있었어요. 아무도 없는 들판에 그냥 자란 거라고 생각한 저는 그중 하나를 똑 따서 손에 쥐었습니다. 맛있는 가지전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는데, 뒤에서 제게 소리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도둑 잡아라! 주인 있는 걸 따 가면 어떡하냐?"

저는 깜짝 놀라 냅다 달렸습니다. 주인이 있는 줄 몰랐다고 입에서는 웅얼거렸지만, 손에 쥔 가지는 놓지 않았어요.


꿈에서 깨고 보니 슬그머니 웃음이 났습니다. 어제 잔디와 잡풀이 무성한 창고 앞 작은 땅에 가지 모종 두 개, 고추 모종 두 개를 심었거든요. 거름도 주지 않고 김도 매지 않는 척박한 땅에 꽂으면서도 내심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기를 바랐나 봅니다. 꿈까지 꾼 걸 보면, 산책하는 사람들이 따가면 어쩌나 걱정도 했던 모양이에요.


꿈속과 비슷하게 실제로 서리를 하다가 된통 걸린 적이 있습니다. 십 년쯤 전이었나 봐요. 단오 무렵이 되어 익모초를 구하러 산에 갔는데, 산 초입에 잘 자란 익모초들이 있는 거예요. 주인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하고, 신나게 꺾었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저 너머에서 "그거 따면 안 돼요!"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제야 그것들이 누군가 심었던 거였구나 깨닫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습니다. 몰랐다고 용서를 구하기에는 너무 많이 꺾어 버렸거든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


동네 할아버지의 서리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아이들과 텃밭 나들이를 함께 가주시던 할아버지는 너무도 노련한 솜씨로 호박이며 가지며 고추며, 잘 익은 작물들을 은근슬쩍 따시는 거예요. 저는 당황스러웠지만 아이들에게 뭐라고 설명하기가 어려워 모르는 척해야 했죠. 할아버지는 그렇게  작물들을 제 배낭에 슬그머니 넣으셨어요. 나중에 할아버지에게 "남의 것을 따 주지는 마세요."라고 조심스레 말씀을 건넸으나, 할아버지는 "그거 **네 밭이여. 그만큼 열려도 다 먹지도 못혀! 그리고 서리 내리면 어차피 다 버리는겨."라고 하면서 웃어넘기시더군요. 할아버지에게 그 작물은 불법적으로 취득한 장물이 아니라, 바쁜 이웃 대신 걷어 들여 나눠먹는 수확물이었던 거지요. 주인은 도둑맞았다고 생각하거나 말거나.


며칠 전, 오일장이 열리는 장날에 아이들과 시장 나들이를 다녀왔어요. 다가올 단오잔치에 무엇을 팔면 좋을까, 아이들과 시장 조사를 하기로 했거든요. 저도 오랜만에 나가는 장이라 어찌나 구경거리가 많던지요. 아이들에게도 시장에서 간식을 해결하고 오라는 미션을 주었더니 싱글벙글합니다.


텃밭에 심을 모종도 샀어요. 아이들이 경작하는 밭에는 이미 감자들이 자라고 있고, 씨앗을 뿌려 키우고 있는 작물들도 많아서 모종을 심을 자리가 별로 없어요. 요것도, 조것도 다 키워보고 싶지만 욕심을 부리면 후회를 하겠기에, 요청받는 작물을 요청받은 개수만큼만 삽니다.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도 그것을 받아 안을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성실히 돌볼 각오가 서 있는지, 결실을 내지 못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

잔디가 자라든 잡초가 자라든 그냥 두었던 땅이었는데, 열매를 기대하는 작물을 심었으니 이제는 조금 더 자주 들여다봐야겠지요?
아이들의 그림에서도 시금치와 대파, 당근이 쑥쑥 자라고 있네요.

텃밭 관찰 그림을 그리러 나갔습니다. 자기들이 심은 작물을 들여다보던 아이들의 대화입니다.

"대파 싹이 너무 많아."

"우리는 시금치 벌써 솎았어."

"그래? 우리도 솎아야겠네."

'솎는다'는 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쓰는 아이들이 대견할 뿐입니다. 제 눈엔 크게 달라 보이지 않지만, 애정을 듬뿍 갖고 자신들의 작물을 지켜보는 아이들이 참 사랑스러워요. 물론 작물 관찰과 그림 그리기는 빛의 속도로 해치우고 마실 나온 곤충을 보러 머리를 맞대지만요.


감꽃도 장미꽃도 예쁜 절기이지만, 밭에서 흙을 만지며 노는 아이들은 더 예쁜 날들입니다. 흙을 아끼고 생명을 가까이하면서 사는 생활은 교사가 가르쳐 줄 수 있는 범위와는 차원이 다른, 더없이 소중한 배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 절기에 화려한 꽃 색깔이 제 발걸음만 붙잡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아이들의 그림에서도 여러 가지 화려한 꽃 색깔이 보이고, 그리는 꽃송이 송이도 큼지막해집니다. 양기가 쭉쭉 뻗어 올라가고 있어요! 온누리에 충만한 이 기운을 받아 새로 심은 모종도, 아이들도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봅니다. 튼튼하고, 씩씩하게요!

색상이 다양해져서일까요, 아이들의 그림에서도 여름에 접어드는 생기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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