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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Oct 09. 2024

긁다

나도 누가 등을 긁어주면 좋겠네

사람들은 자신들을 별난 종족이라고 생각하지.

가장 대표적인 '호모 사피엔스'를 비롯하여 호모 루덴스니, 호모 이코노미쿠스니, 호모 폴리티쿠스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특질을 자신들만의 것인 양 가져다 쓰면서 으스대곤 해. 


하루 중 반 이상 잠을 자고 창밖에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며

우주의 섭리를 직관하는 내 눈에 비친 인간은

그들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별나고 위대해 보일 때도 없진 않지만,

대개는 우리와 그다지 다를 바 없어 보이고,

그보다 자주는 우리보다 후져 보이지.

냄새를 맡는 기능이나 높은 데서 사뿐히 뛰어내리는 순발력 등 우리가 사람들보다 훌륭한 능력은 손꼽을 수 없이 많으니까.


그중 대표적인 것이 유연성인데, 사람들은 몸을 이리저리 꼬고 비트는 요가라는 걸 할 때 우리를 몹시 부러워하는 것 같더군. 이름도 고양이 자세라고 붙였다는 말을 들었네.


십오륙 년 전쯤인가,

집사의 딸내미가 말도 잘 못하던 두세 살 때 일이야.

어느 산 아래 물놀이장에 다녀온 뒤 집사의 딸은 가려움을 호소하기 시작했어.

아토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두드러기나 발진처럼 눈으로 보이는 증상은 전혀 없는데

유독 등만 가렵다고 하는 거야.

잠이 들 때까지 긁어줘야 하는 건 물론이고,

길을 가거나 밥을 먹거나 놀다가도 갑자기 가렵다고 호소했어.

병원에 데리고 가 봐도 눈에 보이는 증상이 없으니 정확한 진단을 받을 수도 없었지만,

가려움을 가라앉히는 약물을 주고 싶지도 않아 했지.

참을성이 없는 아이는 아니었는데 가려움이 한번 시작되면 발작을 일으키듯 울어대서

엄마는 아무 데서고 손을 넣어 괜찮아질 때까지 긁어주고 또 긁어주고.


아이의 가려움은 어린이집에서도 다르지 않았는데,

당시 아이를 맡았던 젊은 여교사는 주머니에 까실한 수건을 넣고 다녔다고 해.

긴 손톱으로 아이를 다치게 할까 걱정되어서 그랬다지만

여럿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다 보니 혹여나 다른 아이에게 전염시킬까 우려했던 것 같아.

집사 딸은 일이 년 그러다가 점차 빈도가 줄어들면서 어느 순간 증상이 사라졌지만,

그 후 여자 집사는 그 물놀이장 쪽은 쳐다도 안 본다지.


그루밍을 하며 귀 뒤를 긁다가,

잠을 자고 깬 뒤에 스크래처를 앞발로 득득 긁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나도 누가 긁어주면 좋겠다.'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가려운 데를 긁을 수도 있지만

집사의 딸내미처럼 끝내 원인을 알 수 없었던 가려움은

다른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만 가라앉을지도 모르겠네.

노부부가 서로 등을 긁어주는 행동은

손이 닿지 않는 곳의 가려움을 해소하기도 하겠지만,

마침내 홀로 되는 외로움을 담담히 맞을 영양제일 수도 있겠고.


그럴 때 긁는다는 동사는

마음을 어루만진다는 동사와 치환될 수 있겠지.


천부적인 유연성 덕분에 나 혼자 얼마든지 긁 수 있으면서도

팔이 짧아 등을 긁을 수 없는 인간을 부러워하는 날이 오다니,

하아~ 가을은 가을인가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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