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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Oct 14. 2024

마시다

네가 누리는 행복은 당연한 게 아니야

아침에 눈 뜨자마자 한 잔 가득 내리는 시커먼 커피.

콩과 견과류를 넣고 드드득 갈아 만드는 두유.

어느 날은 결명자, 어느 날은 볶은 보리와 옥수수를 넣고 끓인 물.

소화가 안 될 때마다 한 잔씩 들이키는 시원한 매실 주스.

그리고 모든 반찬의 안주화를 선언한 듯, 음식을 만들 때면 으레 등장하는 캔맥주.


뭘 그렇게 마셔대는지,

우리집 여자 집사는 손에 컵을 들고 있을 때가 많아.

우리에게는 커다란 그릇에 수돗물만 한 가득 받아서 놓아줄 뿐,

씁쓸한 커피도 달콤한 매실도 큼큼한 맥주도 먹어보라고 한 모금 준 적이 없어, 치사하게.

하긴, 준다고 해도 입맛에 맞을 것 같지도 않네.

우리가 잘 먹는다고들 하는 우유도 먹어본 지 오래 되어 그런가,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니까!


'물이나 따위의 액체를 목구멍으로 넘기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설명된 대로라면 우리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우리도 물을 마신다고 해야 하는데,

물그릇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혀로 할짝대는 것도 마신다는 단어를 쓸 수 있을까?

고양이가 물을 마시고, 우유를 마신다고? 글쎄, 좀 이상하지 않아?


액체류를 목구멍으로 넘기는 같은 행동을 하는데

사람들과 달리 우리에게는 그 단어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았어.

단순하더군.

사람들은 물이든 술이든 그것을 컵이나 그릇에 담아서 손으로 들고 목구멍으로 붓는데,

우리 고양이들은 앞발로 물그릇을 들지 않고 입을 그릇에 가져다댄 뒤 혀를 내밀어 핥는 거니까.


사람들은 입을 그릇에 직접 대고 먹는 걸 혐오해.

짐승들이나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지.

자기들은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니까

밥이든 물이든 도구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은 미개한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내가 오늘 말하고 싶은 건,

도구가 아니라 그 도구를 사용하는 에 관한 것이네.

우리들의 앞발은 손이 아니라서 마실 때 도움을 주지 못해.

그러나 자네들은 손의 도움을 받아 마시지.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든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따든 손의 도움을 받아야 인간답게 마실 수 있다는 말인데,

자네는 커피를 마시고 맥주를 따면서 손을 의식해 본 적은 있는가?

피곤할 때 카페인을 채워주고

즐거운 대화를 나눌 때 필요했던 알코올을 주입하며,

아니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깨끗한 물 한 잔을 마시면서

그것을 마시게 해준 손의 존재를 생각해 본 적은 있는가?


끼니 때가 되면 밥상에 수저가 놓이고

갈증이 나면 컵에 시원한 물을 따르고

먹고 마신 뒤 찌꺼기들을 배출하고픈 신호가 오고

하루해가 저물어 잠이 쏟아지면 잠자리에 몸을 누이는 일상에 함께했던 내 손.

그리고 사람으로 태어나 기본적인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있도록

내 몸처럼 곁에 있어 준, 고마운 남의 손들.


그 의식하지 못한 손들을 혹,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손들로 인해 얻은 행복도 혹,

내가 누려야 할 당연한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길고양이들은 목을 축일 물을 구하러 다니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 만물이 얼어붙는 겨울에는 더 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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