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집사!
오랜만이야. 나, 기억하나?
지난 겨울, 뉴질랜드에서 만난 늙은 고양이.
우리 주인은 하룻밤 묵으러 온 자네 가족에게 나를 "He is very very very o~~~ld"라고 소개했지.
스무 살 가까이 먹었으니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하지만, 뭐 'very'를 세 번이나 반복할 것까지야.
아무튼 그런 날 보며 자네들은 귀엽다고 쓰다듬었지.
버릇없이 호호 할배한테 귀엽다니, 냥펀치라도 한 방 날려주고 싶었지만 그나마도 기운이 없어 관뒀다네.
그런데 왜 이렇게 코가 쑥 빠져 있어?
설마 엊그제 있었던 접촉사고 때문에 아직까지도 마음이 안 좋은 거야?
사람 크게 다치지 않고 보험 통해 잘 마무리되었잖아. 근데도 마음이 안 좋아?
물론 자네 심정은 알겠어.
법규를 위반하지도 않았고, 상대방이 와서 들이박은 거라 자네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지. 그러면서도 아주 짧은 순간, 0.1초만 더 빨리 판단하고 브레이크를 밟았더라면 부딪히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자네가 자네 다리를 탓하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브레이크와 엑셀을 잘못 밟아 일어났던 더 큰 사고들에 비하면, 자네야말로 정말 다행하고 감사한 일 아니겠나.
그 일 때문만은 아니라고?
아하, 그럼 과실 여부나 보상, 차량 수리 등 여러 가지 복잡한 보험 처리 과정에서 빠릿빠릿하게 알아듣지 못한 자네의 인지 능력이 그토록 자네를 우울하게 만드는 거였구만.
어떤 문제든지 단번에 알아듣고 이해하던 총기는 사라지고, 조금만 빨리 말하면 알아듣지 못해서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 천천히 설명해 주시겠어요?"라고 반복하는 일이 잦아지니, 괜한 일에 주눅이 들고 점점 바보가 되어 가는 것 같아 울적한 마음. 그런 것, 맞지?
이봐, 자네가 평생 품어 온 두 가지 소원을 기억해 보게.
하나는 '평범하게 살기'였고, 또 하나는 '늙어 죽기' 아니었던가?
평범하게 사는 거야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오늘은 늙어 죽기를 소원이라고 했던 것만 기억해 보자고.
자네는 다쳐서 죽거나 아파서 죽지 않고, 늙어서 죽고 싶다고 했잖아. 촛불의 심지가 몸을 다 태우고 흰 재가 되어 사그라지듯이 그렇게 조용히 꺼져 가고 싶다고.
그런데 늙어 죽는다는 건 말이야, 촛불을 훅 불어 끄는 것처럼 거칠고 빠르게 다가오지 않아.
자네 다리처럼 어제보다 0.1초 더 늦어지고,
자네 이해력처럼 어제보다 조금 더 버벅거리다가, 그러다 마침내 움직이지 않는 순간까지 가는 걸 말하네.
어린아이나 젊은이들은 할 줄 아는 게 '늘'어가는 사람들이라면,
늙는다는 건 '늘'어가는 게 '그'쳐 간다는 말이야.
그러니 '늙다'라는 말도, '늘다'라는 단어 밑에 조심스레 'ㄱ'을 붙여 쓰는 게 아닌가 해.
그러니 이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우울해하지 말고,
'아, 내가 소원대로 잘 늙어가고 있구나.' 하고 감사하라는 말이네.
깜빡깜빡 잊어버리는 것도,
글을 쓰다가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답답해하는 것도,
산을 오르며 숨을 고르느라 쉬는 시간이 많아져도,
팔 다리 어깨 허리, 아니 쑤시는 곳이 없어진다고 해도
그게 자네 소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라고.
우리는 늙는다고 우울해하지 않아.
젊어지려고 발버둥치지도 않고.
그저 주어진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뿐이야.
늙은 우리처럼 천천히 걷고,
늙은 우리처럼 볕을 받으며 꼬박꼬박 졸고,
늙은 우리처럼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노여워하지 않는 것, 그것도 꽤 괜찮다네.
그렇게 우리 같이 늙어가 보세나, 먼 데 사는 집사 양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