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방구리 Nov 10. 2024

하느님은 거지가 아니거든!

연중 제32주일 / 마르코복음 12,38-44 / 평신도 주일

초등학교 때 앞집에 살던 친구를 성당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집 엄마와 우리 엄마가 친구 사이여서 그 집 딸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놀았는데요, 일요일에는 제가 성당에 간다고 하니까 혼자 놀기 심심했는지 따라나서더라고요. 성당에 처음 가 본 그 친구는 모든 게 신기한지 제게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신부님 보고 "저 아저씨는 왜 저런 치마를 입어?"라고 묻기도 하고, 제대 뒤에 있는 감실을 보고는 "냉장고를 왜 저기에 뒀어?"라고도 했습니다. 물색없이 큰 소리로 는 바람에 앞뒤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우리를 쳐다보며 웃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가장 민망했던 순간은 봉헌 때였습니다. 절 쭐래쭐래 따라 온 친구가 헌금을 가져왔을 리가 없지요. 그때는 저도 헌금으로 동전 몇 개를 냈는데요, 제 돈을 친구에게 나눠주며 헌금통에 넣으라고 했어요. 봉헌이 시작되고 줄을 서서 나가다 보니 친구가 먼저 가게 되고 제가 그 뒤를 따라갔는데, 친구는 헌금통 앞에 서더니 말릴 사이도 없이 동전을  던져 넣는 게 아니겠어요? 다들 두 손으로 공손히 갖다 넣는 게 불문율처럼 지켜지던 때라, 친구가 던지며 냈던 '짤그랑' 소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도 남았습니다.


돈을 받는 상대가 눈에 보였더라도 그렇게 했을까요? 성당에 다녀본 적도 없고 봉헌금의 의미도 전혀 몰랐던 친구는 마냥 해맑게 자리로 돌아왔지만, 저는 어찌나 창피하던지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하느님이 거지도 아니고, 아니 걸인에게 적선을 한다고 해도 받는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코딱지만큼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동전을 소리 나도록 던져 넣지는 않았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헌금함 앞에서 사람들이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고 합니다. 부자가 큰돈을 넣는 모습도 보셨고, 가난한 과부가 와서 렙톤 두 닢을 넣는 모습도 보셨습니다. 복음에서 '렙톤 두 닢=콰드란스 한 닢'이라고 친절하게 환율 계산을 해주고 있지만, 렙톤이든 콰드란스든 요즘 우리네 백 원 동전처럼 생계 유지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적은 돈이었답니다.


예수님은 과부가 자기가 가진 모든 것,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넣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저는 '생활비'라고 번역된 부분에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아무리 어렵게 산다고 해도 빵 한 쪽 살 수 없을 만큼의 적은 돈을 두고 '생활비'라고 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그리고 아무리 신심이 깊다 한들, 이 돈 내고 그 길로 죽으러 간다고 결심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생활비 전부, 가진 돈 전부를 헌금함에 갖다 바치겠어요?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는 '돈'(생활비)이 아니라, '(돈도 포함된) 가진 것 전부'라는 데 방점을 찍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활비라고 번역된 부분의 독일어 성서에도 돈(Geld)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아요. 44절에는 "von ihrer Armut alles, wovon sie lebt, ihre ganze Habe,"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또한 '그녀가 살아가는 가난과 궁핍함, 그녀가 가진 모든 것'으로 읽혀져요. 제 독일어 실력이 짧아 적확한 번역은 아닐 수 있겠으나, '생활비'라는 낱말과는 뉘앙스가 완전 다르지요.



당시 과부는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생계를 스스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경제적으로도 가난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소외되었기에 몸도 마음도 궁핍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날 과부가 헌금함에 봉헌한 것은 자신이 가진 '돈, 렙톤 두 닢'뿐 아니라, 자신의 빈곤, 궁핍, 외로움, 절망까지 자신이 '가진 것 전부'였습니다. 과부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 모르지만, 과부는 다른 것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그리 가난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살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리는 마음을 렙톤 두 닢과 함께 바쳤을 수도 있지요.


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과부의 헌금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핵심은 교회에 바치는 돈이 아니라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돈을 얼마나 갖다 바치는지를 보려고 헌금함 앞에 앉아 계시는 게 아니었을 거예요. 예수님이 벼룩의 간을 빼먹는 사람도 아니고, 가뜩이나 가난한 과부가 주머니를 탈탈 털어 헌금하는 것을 본받으라고 하셨을 리가 없지요. 그러시기는커녕 제자들이 갖고 있던 돈이라도 더 쥐어 보내고 싶으셨을 겁니다.


바로 앞에 나오는 율법 학자들의 모습과 대비해 보아도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허세에 절어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12,40) 하는 율법 학자들을 비판하시지요.


기도는 길게 할 필요가 없어요. 자신에게 없는 것을 지어서 할 필요도 없고요. 자신이 가진 것이 궁핍이든 부유함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외로움이든 충만함이든, 고통이든 영광이든 그 무엇이든지 자신이 '가진 것 전부'를 하느님 앞에 내놓는 것이 참된 기도이고, 과부의 헌금입니다. 설령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빵 한쪽 살 수 없을 만큼 적고 쓸모없어 보이는 동전의 가치처럼 보여도, 하느님은 우리의 봉헌을 기쁘게 받으실 겁니다. 하느님은 '억지로 최선을 다하려는' 우리보다도 '있는 그대로를 겸손하게 보여드리는' 우리를 더 어여삐 여기시리라 믿습니다.  


사족입니다만, 저는 성전 건축 기금을 걷어야 하거나 밀린 교무금을 내라고 할 때 이 복음 말씀을 인용하시는 사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사제들이 강론석에서 교우들에게 가장 하기 힘든 말이 돈 내라는 말이기에, 성서를 근거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제게 반골 성향이 있어서 그런지, 이 말씀을 헌금 납부 독촉용으로 갖다 쓰는 데는 왠지 반감이 들더라고요.


이런 의미에서도 헌금은 성당에 가기 전에 미리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이번 주간에는 이 돈과 함께 내가 가진 무엇을 하느님께 봉헌할 것인지 미리 생각하고 챙겨야지요. 해설자가 "예물 봉헌 시간입니다. 봉헌하시는 동안 성가 몇 번~"라고 말할 때, 그때서야 허겁지겁 주머니를 뒤지거나 지갑에서 주섬주섬 꺼내서 봉헌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지요. 돈의 액수는 적어도 걱정과 두려움을, 감사와 찬미를, 앞으로의 삶을, 나아가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봉헌하는 것이 과부의 헌금에 맞갖은 태도일 듯합니다. 저 역시 이번 주부터는 봉헌을 하는 마음가짐을 달리 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한 장? 아님 한 장 더? 2차 헌금은 해? 하지 말까?' 하고 머릿속에서 돈만 세 말고요.


참, 처음에 말씀드렸던 친구는 그 이후 성당에는 다시 데리고 가지 않았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소식이 끊겨 지금은 생사도 모르지요. 만약 기적처럼 그 친구가 이 글을 읽는다면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긴 하네요.


"돈이든 물건이든,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때는 던지듯 주지 않기를 바라.

상대방이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든 보이지 않는 존재든 간에 말이야.

하느님이 우리 사랑과 기도를 거지처럼 기다리기는 하지만, 돈만 바라는 거지는 아니거든!"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Warnung vor den Schriftgelehrten]
Und er lehrte sie und sagte zu ihnen: Nehmt euch in acht vor den Schriftgelehrten, die gern in langen Gewändern einhergehen und sich auf dem Markt grüßen lassen und in den Synagogen und am Tisch beim Mahl gern oberan sitzen; sie fressen die Häuser der Witwen und verrichten zum Schein lange Gebete. Die werden ein um so härteres Urteil empfangen.
[Das Opfer der Witwe]
Und Jesus setzte sich dem Gotteskasten gegenüber und sah zu, wie das Volk in den Gotteskasten Geld einlegte. Und viele Reiche legten viel ein. Und es kam eine arme Witwe und legte zwei Heller ein; das macht zusammen einen Pfennig. Und er rief seine Jünger zu sich und sagte zu ihnen: Wahrlich, ich sage euch: Diese arme Witwe hat mehr in den Gotteskasten gelegt als alle andern, die etwas von ihrem Überfluß eingelegt; diese aber hat von ihrer Armut alles, wovon sie lebt, ihre ganze Habe, eingeleg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