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방구리 Nov 03. 2024

'엑기스'만 알아도 천국 갑니다

연중 제31주일 / 마르코복음 12,28-34

"옷차~림은 깨끗이~

몸가~짐은 똑바로~

남~에게는 친절히~

말~대답은 공손히~

예절 바른 어린이~ **어린이~"


얼마 전 성묘를 다녀오다가 남편이 다녔다는 초등학교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산 정기 아래~"로 시작하는 초등학교 교가를 부르기 시작했지요. 그 바람에 저도 졸업한 지 거의 50년 만에 제가 졸업한 초등학교 교가를 불러 보았습니다. 그동안 떠올려본 적 없는 가사였는데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게 첫 번째로 신기했고, 근처에 있는 '**산 정기받아'로 시작하는 보통 초등학교 교가와는 달리 옷차림, 몸가짐, 말대답 같은 구체적인 태도를 교가 1절로 정했던 제 모교의 독특함이 두 번째로 신기했습니다. 어쩌면 아이들에게는 무슨무슨 산 정기보다도 더 와닿는 가사인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유달리 영특하거나 모교를 사랑하는 마음이 차고 넘쳐서 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교가를 외우고 있는 건 아닐 거예요. 이후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도 교가도 불러왔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비교적 선생님 말씀을 잘 듣던 어린 시절에 외운 거라 그런가 봅니다. 교가 다음으로 입에서 거미줄처럼 뽑아낼 수 있는  '국민교육헌장'이나 애국가모두 초등학교 때 외운 거지요.


그렇지만 입으로 외우려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시험을 잘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나 봅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마음에 드는 시도 외웠고 '정치 경제' 과목을 배울 때는 헌법을 좔좔 외우기도 했거든요.(헌법도 얼마든지 개정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게 진리인 줄 알았던 세상 어리석은 짓...) 어쨌든 그게 성적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 저는 그 후에도 제 내면에 각인하고 싶은 글이 있으면 암기해 보려고 했답니다. [청춘예찬]이나 [지란지교를 꿈꾸며] 같은 에세이, 수녀원에서 살 때는 청소할 때마다 회칙인 [생명의 책]을 한 구절씩 외웠습니다. 다만 총기 가득한 어린 시절에 외운 게 아니어서 지금은 다 잊었지만요.


오늘 복음은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독일어 성경의 부제에 따르면 '모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계명(das allerwichtigste Gebot)'입니다. 그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 둘은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계명입니다. 우리가 너무도 자주 들어온 말씀이기도 하지요.


저는 오늘 이 계명보다, 이 계명을 주시기 위해 대화를 나누신 사람이 '율법학자'라는 데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율법학자는 613개나 되던 율법을 공부하고 가르치던 사람입니다. 학자씩이나 되어 율법을 어기면 안 되었을 테니 머리로는 율법을 줄줄 다 외웠을 거고, 몸에는 율법이 배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율법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게 뭐지?'라는 의문을 갖고 살았던 듯합니다. 율법학자는 학자답게 예수님의 토론과 대답을 귀 기울여 듣고는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예수님의 명쾌한 답을 들은 그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풀린 듯 무릎을 쳤을 겁니다. 그러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훌륭하십니다, 스승님."이라고 칭하며 자신이 깨달은 바를 말하지요. 예수님은 그에게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고 답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그리 좋아하거나 칭찬하지 않으셨어요. 오늘 복음 다음 구절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38ㄴ-40) 그런데도 율법 안에 면면히 흐르는 가장 중요한 정신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율법학자에게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거지요.


요즘 읽기 시작한 책의 저자도 머리말에서 비슷한 말을 합니다.

나는 헌법을 공부하면서 각 조항이 나의 일상에 어떤 의미와 방향을 제시하는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헌법이란 국가의 미래상을 제시하는 핵심가치를 요약한 근본 규범입니다. 한 나라의 최고법인 헌법에 대한 공부는 추상적으로 이론화된 지식인 '소피아 Sophia'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지혜는 '프로네시스 Phronesis'로 발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래서 나는 헌법을 읽으며 나와 대한민국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각오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헌법의 모든 조문은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개개인의 구체적 생활양식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일생에 한 번은 헌법을 읽어라] 이효원, 현대지성, 들어가며 중에서.

한 나라의 근본 규범인 헌법이 개개인의 구체적 생활양식이 될 수 있다는 것처럼,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모세 이후로 전해 내려오던 율법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담은 복음서가 개개인의 구체적 생활양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 613개의 율법을 일일이 기억할 필요가 없이 가장 중요한 계명만 '엑기스'로 뽑아 주셨고, 예수님은 이 엑기스대로만 살아간다면 당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율법학자)이라고 해도 하늘나라에서 멀지 않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예수님 당신이 주시는 새 계명도 이 엑기스와 성분은 똑같다고요!


그러니 굳이 두꺼운 신구약 성서를 몽땅 다 외우기 위해서 안 돌아가는 머리를 쥐어뜯을 필요가 없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이 가장 중요한 계명만 기억하면 되지요. 물론, 이를 머리로만 기억하고 구체적인 행동이나 삶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면 말짱 꽝이라는 것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정답도 알려주고 엑기스도 뽑아 줬는데 살아온 삶이 백지라면, 심판관이신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손 들고 종아리를 걷어야 할 수도 있음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가장 큰 계명]
율법학자 한 사람이 이렇게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Die Frage nach dem wichtigsten Gebot]
Und es trat ein Schriftgelehrter zu ihm, der ihnen zugehört hatte, wie sie miteinander stritten. Und als er merkte, daß er ihnen klug geantwortet hatte, fragte er ihn: Welches ist das allerwichtigste Gebot? Jesus aber antwortete ihm: Das wichtigste Gebot ist das: "Höre, Israel, der Herr, unser Gott, ist Herr allein, und du sollst den Herrn, deinen Gott, lieben mit ganzen Herzen, mit ganzer Seele, mit all deinem Verstand und mit all deiner Kraft."(5.Mose 6,4-5) Das andre ist dies: "Du sollst deinen Nächsten lieben wie dich selbst."(3.Mose 19,18) Kein anderes Gebot ist wichtiger als diese beiden. Und der Schriftgelehrte sagte zu ihm: Meister, du hast wahrhaftig recht! Er ist Herr allein, und es gibt keinen andern außer ihm; und ihn lieben mit ganzen Herzen, mit aller Einsicht und mit aller Kraft, und seinen Nächsten lieben wie sich selbst, das ist mehr als alle Brandopfer und Schlachtopfer. Als Jesus aber sah, daß er verständig geantwortet hatte, sagte er zu ihm: Du bist nicht fern vom Reich Gottes. Und niemand wagte, ihn noch weiter zu fragen.

*대문사진 출처 / 픽사베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