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아이러니

수해

by 뚜와소나무

강남역이 침수되고 폭우가 쏟아지던 날 밤

시골에 사는 나는 뒷집 옹벽이 무너질까 봐

언덕 위의 소나무가 뒷집으로 쓰러질까 봐

편히 자지 못하고 여러 번 뒤척였다.

수해로 얼마나 많은 분들이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을까? 걱정스럽다.


내 어린 시절에도 물난리가 났었다.

40년 전 초등학생 시절,

태풍으로 며칠간 어마어마한 비가 내리더니

불어난 강물이 둑과 철길을 넘어와

그 안쪽에 있던 읍내가 온통 물에 잠기는 수해가 났다.

축사에 있어야 할 돼지들이 두웅둥 떠다녔다.

냉장고는 물속에서 거꾸로 뒤집어졌고,

겉옷 속옷 할 것 없이 죄다 흙탕물과 똥물에 범벅이 되었다.

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관이 떠내려 온 곳도 있었다.

우리 집은 그나마 언덕 중간 즈음에 있어서 수해를 입지 않았지만,

시장 안에 있었던 아버지의 가게는

1층과 2층 모두 황토 뻘 속에 잠겼다.

여름방학이 끝나도 학교에선 등교하라는 말이 없었다.

더위와 수해로 빠르게 썩어가는 냄새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을 다 씻어내야 하는 상황이라

우리는 가게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냇가나 강 가로 가져가서

끝도 없이 씻고 또 씻고 말리고를 반복해야 했다.

내 친구네 집은 산사태로 땅의 상당 부분이 쓸려 내려가

그해 농사를 망친 것은 물론이고

다음 해 농사지을 땅이 사라져 버리는 일을 당했다.

며칠 후 침수됐던 도로 일부가 복구되면서 방송국에서 기자들이 취재하러 왔고,

동네분들은 낯선 카메라 앞에서 ‘아이고! 어떻게 살지 막막합니다.’라며 울먹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루하루를 다들 억척스레 살아냈다.


변심한 애인 때문에 가끔 농약을 찾던 시절이었지만,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그 난리통에도

사람들은 우리 집, 옆집, 앞집, 뒷집 일을 서로 거들면서 그렇게 조금씩 다시 일어났다.

수해 현장에서 뚜렷이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내 생애 처음 본 백인 수녀님들이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파란 눈의 여성들이

이상하게 생긴 옷을 입고 나타났는데,

한국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조용히 온정이 가득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리곤 한국인 수녀님을 따라 마을 여기저기로 흩어져 온갖 허드렛일을 하셨다.

파란 눈의 수녀님들은 쓰레기를 퍼 담은 리어카를 끌고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종교도, 인종도, 사는 형편도, 그 무엇도 개의치 않고

낙담하는 이들의 일손을 거침없이 거들어주셨던 모습이 내 눈에 남아 있다.

수해현장이 아홉 시 뉴스로 나간 후

전국에서 아주 많은 분들이 성금과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보내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감사했다.

매일 저녁 낙담과 지친 몸으로 쓰러져 눕던 날들은

제법 긴 시간을 지나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학교에 나가 공부할 수 있게 됐다.

코로나팬더믹으로 평온하던 일상이 깨어지고,

언제 다시 원상태로 회복될지 알 수 없어 불안했던 지난 2년 끝에

이번에는 수해로 엎친데 덮친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 고통이 훗날에는 그분들에게 자부심과 따뜻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개인적으로도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거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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