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감찰, 의무시행, 정보공개 청구, 회부, 요구자료… 공공기관 종사자들이 공히 싫어하는 단어들이다. 확신컨대 거기에 보태 분명 탑 쓰리 안에 들 것이 또 있다. 바로 민원. 다른 곳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내가 속한 조직은 민원 전용 시스템이 있어서 민원이 정식 접수, 분류, 담당 지정, 처리되는 과정을 매일 실시간으로 확인, 대응해야 한다. 다시 말해 업무로 다루든 그렇지 않든 1이라는 숫자가 뜨는 순간, 심리적 압박은 시작되는 것이다. 의무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날짜도 정해져 있으며 미뤄질 경우, 미뤄진다는 것과 그 근거까지 민원인에게 통보된다. 법적 근거가 같으니 아마 다른 기관 종사자들도 비슷한 시스템과 절차를 거쳐 각자 친절히 응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수년 전부터 내가 속한 조직에서는 민원담당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해마다 1박 2일 힐링 프로그램이 시행되었으며 고질적 민원 업무는 따로 기피업무로 지정해 인사고과 점수에도 반영시킨다. 즉, 조직 내에서도 민원전담을 제대로 된 감정 노동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CS 전문회사만큼은 아닐지언정 작든 크든 민원 업무는 공공기관 종사자들에게도 정신적, 심리적 영향을 미친다. 나라의 녹을 먹는다는 이유로 공론화될 경우 문제가 커지기 마련이며 신분이 노출되기도 쉬워 각종 부당한 상황에서도 감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예전 알고 지내던 직원을 오랜만에 다시 만난 적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현 소속과 담당 업무를 물어보았는데 그는 요즘 자신이 부서 내 모든 민원을 전담하고 있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한편 어딘가 약간의 기대감과 흥분 같은 것도 느껴졌는데 들어보니 민원으로 고생하고 있는 만큼 팀장부터 부서장까지 누구든 자신을 건드릴 수 없고 조만간 근무평가도 유리하게 받을 예정이라는 것이다. 나중 살펴보니 실제 그 직원에게 부서 내 민원 업무 전체가 쏠려있었고 산술적으로만 보아도 거의 1일 1 민원을 처리하고 있었다. 세상에 1일 1 민원이라니. ‘안녕하세요 000 선생님, 보내주신… 감사합니다. … 사용 중 불편을 느끼신 점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를 매일, 정말 매일 쓰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민원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비슷한 내용이 부지기수라 몇 가지로 압축, 정리되고 처리도 효율화되기는 한다. 그러나 모두가 처음인 것처럼 한 명 한 명 충분한 예의와 현실제도상의 한계와 안타까움, 낮은 자세와 세심함을 유지해 민원문을 작성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힘든 것은 그 앞뒤로 받아(내)야 하는 전화. 갖가지 부정적 언사로 점철된 전화, 전화, 전화들. 감정 노동에 취약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생각만 해도 피로감이다. 분명 높은 성과를 인정받아야 하는 일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민원은 크게는 두 종류로 나눠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인적 차원의 민원과 조직적 차원의 민원. 개인적 차원의 민원은 주차나 소음, 오물, 반려 동물 관련 사항 등 그야말로 개인 생활 불편을 호소하는 건들로 전체 민원 중 절대다수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생활불편 민원들은 주로 거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기초단체로 간다면 광역 단체로는 각종 창의적 아이디어 제안들이 많은 편이다. 개인의 재산상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이런 민원들도 일차적으로는 기초 단체 쪽으로 가거나 동일 내용을 양쪽을 보내기도 하는 등 어느 정도 분산 처리되는데 주택 개발 단계를 둘러싼 것들이 대표적인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소속 특징상 개인적으로 담당, 처리해 본 건들 중에는 정책이나 아이디어 제안이 가장 많았다. 보내주신 민원인들은 나름대로는 훌륭하고 좋은 생각이라 보내주셨겠지만 단순 예산뿐 아니라 법적‧행정적‧절차적 사유, 쉽게 말해 현실적 이유로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오래전이지만 기억에 남는 건은 알파벳 세 글자를 단 아이돌 그룹 팬클럽의 제안 민원이다. 그룹을 위한 개별 문화공간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는데 당시에도 꽤나 강성이던 팬클럽은 이제는 자신들의 아이돌만큼이나 성장, 발전해 전 세계적 네트워크와 저력을 과시하는 등 독보적 존재감을 갖고 있다. 당시 조금은 그들을 두려워하며 초상권, 저작권 등등 이유와 안타까움, 관심에 대한 감사를 담아 나름대로 조심조심 내용을 작성했던 기억이다.
곤혹스러운 민원 중 또 다른 종류에는 조직 수장과 관련된 건들도 있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재직기간 동안 경험해 본 바 조직 최고 수장들은 어떤 제안도 절대 현장에서는 거절하지 않았다. 쉽게 말해 포럼이나 공청회, 설명회, 간담회 등 공식석상과 현장 시찰중 직접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어떤 이야기든 거절할 수 없으며 우선은(!) 수용이다. 현실적으로야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눈 앞에서는 ‘좋은 제안이시다, 검토해 보겠다’ 등 돌려 말할 수밖에 없는데 동창회 등 사적 자리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조직 수장의 이런 사소한 반응과 간접 수용 태도들은 결국 담당자에게는 업무지시, 아니면 민원으로 돌아온다. 업무지시일 경우 분명히 형식을 갖춰 전달되고 체계 안에서 철저히 관리되니 빠르든 늦든 추진될 수밖에 없지만 그 반대 경우 일선 현장 담당자들은 전혀 알 수 없다. 다각도로 검토해 보라는 지시도 아니면 대부분 불가능 것들이니 (민원인 외에는) 모두의 관심밖에 있다 시간이 지나 (담당자에게만) 돌아온다. 민원인은 관련 부서, 담당자를 찾아 최고 수장은 알겠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왜 (암묵적임에도) 수용한 제안들이 즉시 추진되지 않는 것인지, 궁금해하시고 최악의 경우 즉시 처리해 달라고 하시는데…. 담당자로서는 매우 곤욕스러울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대략 난감일 때가 많다.
출산감소, 인구절벽의 시대. 사회 모든 분야 비대면화가 성큼 다가온 지금.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공공기관 종사자 역시 줄어들 것이라 예측한다. 관공서 앞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해 주는 이가 키오스크이며 코로나 이후 앞당겨진 비대면, 자동화 시스템이 각종 생성형 AI로 급격히 버전 업되고 있는 지금, 행정인력과 수요 모두가 줄어들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렇다면 미래에는 민원건수도 줄어들게 될까? 왠지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조금 더 정확히 보자면 민원건수라는 절대 숫자 자체는 줄어들 수 있겠지만 인구 대비한 민원 제기 비율은 왠지 늘어날 것만 같다. 기술적으로는 세상 더 많은 것들이 시스템으로 관리될 텐데 더 많은 충돌과 오류들, 쉽게 말해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은 어떤 식으로든 조정, 중재가 필요하고 그렇다면 행정수요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행정서비스 수준에 대한 수요자의 욕구가 나날이 고도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구 자체가 줄어든다 해도 사람들의 다양한 욕구와 창조적 사고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과 가치관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다양화를 넘어 분화, 파편화되고 있으니 각자 가진 행정 서비스에 대한 요구 수준은 더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미래의 공공기관 종사자들은 아마도 더 스마트 해져야 하겠다.(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