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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낮잠을 자자

선유도 공원 산책길에서 챙겨 온 것


얼어버린 수질정화원 뒤 햇살을 듬뿍 받고 있는 부시 울타리



추위가 있는 날엔 미세먼지가 없다.  변덕 많은 겨울의 날씨의 주범이 미세먼지가 된 지 오래된 지금, 찬바람이 얼굴을 찌를지언정 구름까지 몰아낸 청량한 하늘은 우울한 기분을 날려주기에 충분하다.  주말아침, 남편은 미세먼지가 없다는 이유로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열어젖혔다.  깜짝 놀라 소파에서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다가 문득 이럴 바엔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타협이 든다.


양화대교 중간쯤에 위치한 봉우리섬 선유도공원은 가볍게 산책하기 참 좋은 곳이다.  남편은 운동하기 싫어하는 아내를 위해 한강을 가볍게 드라이브하며 달래다 슬며시 공원주차장으로 들어선다.


귀마개를 하고 모자를 눌러썼음에도 선유도공원 입구로 향하는 구름다리 위는 바람의 정점에 있었다.  남편은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친다.  찬바람이 궁상맞게 눈물을 흐르게 한다고 투덜댄다.  이쯤 되면 산책에 의미가 있을까 망설이는 아내의 갈등을 눈치챘는지 선유도공원 쪽으로 소몰이를 한다.  


선유도공원으로 향하는 능선모양의 다리는 잠깐이지만 하늘로 향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날씨가 따뜻할 때 이 다리 위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면 탁 트인 시야에 우쭐대기 십상이다.  선유도공원에 도착도 하기 전에 들뜬 기분을 선물 받기 때문이다.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한강에 숨겨진 섬, 환경 생태공원인 이곳은 사람들의 아기자기한 이야기도 숨겨있는 곳처럼 느껴진다.  친구나 연인, 가족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자유롭게 놀다가 추억을 쌓고 간다.  운이 좋으면 공짜로 공연도 즐기곤 하는데 거친 공연의 질감이 자연과 어우러져 부드럽게 들린다.   


이곳은 과거 정수장 건축구조물을 재활용한 곳으로 의도적으로 녹슨 철재물을 치우지 않은 상태인데, 질서 있게 승기를 잡은 식물들의 군집들을 볼라치면 문명의 이기 속에 지쳐있는 현대인들에게 묘한 쾌감마저 느끼게 해 준다.  그냥 내버려 두면 자연은 우리에게 어떤 선물을 줄지 증거처럼 보여준다고나 할까.  


정수지 공원 안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걷어낸 기둥에는 마른 뿌리의 잔해물이 여름의 미련을 못 버리고 덕지덕지 때 지난 전단지처럼 붙어있다.  마른 담쟁이넝쿨뿌리 옆을 지나는데 문득 지난여름 초록의 넝쿨 밑을 걸으며 너무 좋아 다시금 찾아오겠다는 다짐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이곳은 사진을 찍는 최애 공간으로 봄부터 시작해서 여름까지 싱싱한 담쟁이넝쿨 무더기와 연이은 대나무 숲길의 상쾌함은 계절의 방점을 찍는다.  다양한 새들의 소리는 또 얼마나 우렁차고 아름다운 지!  


찬기가 맴도는 콘크리트 기둥공원을 지나 연꽃으로 꽉 찼던 수질정화원 쪽으로 들어서니 냉기 가득 강화유리로 변한 얼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은 볼 게 없네.  우리는 계단을 타고 강 쪽 길로 들어섰다.  여름이 그늘이라면 겨울엔 양지다.  얼어버린 정화원을 지나 산책길로 들어서니 기분 좋은 햇살이 기다린다.  강에서 바람을 집어삼킨 것일까.  언제부터 바람이 멈췄었나 갸웃거리게 만든다.  섬안은 잡자기 조용했다.


우리는 마른 가지들 사이로 건조하고도 파란 하늘을 보기도 하고 따스한 햇살에 만족하며 말없이 조용히 걸었다.  멀리 햇볕 삼킨 울타리를 소파 삼아 눕듯이 앉아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야옹, 야옹' 적막을 깨며 대꾸를 기다렸는데, 이 녀석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졸음이 쏟아지는 찰나의 순간이었나 보다.  우리는 고양이를 앞에 두고 쪼그리고 앉아 많이 웃었다.  웃음소리가 컸을 텐데 이미 꿈나라로 떠난 뒤였다.




고양이를 앞에 두고 웃다가 우리는 동시에 조용해졌다.  아무리 웃고 떠들어도 이 시간을 버린 망각의 공간에 닿지 않을 테니까.  쌀쌀한 바람이 멈춘 겨울 속 달콤한 양지를 즐기는 행복을 깰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이 녀석이 잠에서 깼을 때는 우리가 다녀갔음조차 기억에 없을 테다.  




겨울의 햇살은 망각의 선물이 아닐까.  따스한 햇살 한 점은 봄과 여름으로 향하게 하는 길을 막는 망각의 시간이다.  겨울의 햇살은 지난여름을 보낸 대지의 기억을 지운다.  마른 가지, 마른 잎사귀 위에 있는 나를 인정하며 나의 지난 시간들을 미련 없이 덮어두면서 숨을 참고 망각해야 한다.  예전의 내 모습을 잊는 시간이다.  한숨 자는 시간만이 허락될 뿐이다.


우리는 한 때 화려했던 나의 시간들을 소환하며 이야기하길 좋아한다.  되풀이하는 기억은 되풀이할수록 과장되고 부풀어지고 위대해진다.  세월의 중력을 거꾸로 쌓는 기억이다.  그럴 봐엔 입을 닫고 낮잠이나 자자.  망각하는 게 차라리 낫다.  나의 기억에 관심 있는 것은 나뿐이다.  묻지 않는 기억이다.  


아무것도 볼 게 없다고 투덜거렸던 선유도 산책길에서 조용하고도 따뜻한 햇살 한점 챙겨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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