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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송세월

서늘한 시대에 살지만 푸른 날을 기대하며



한강은 물이 가득 차서 출렁거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강은 힘차고 거침없었다.  아버지는 상류 쪽을 바라보았고, 멀어서 흐려지는 하류 쪽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아버지는 말했다.


"물을 잘 봐라.  흐르는 물을 보면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낀다.  물이 흘러가는구나."


나는 좀 더 자란 후에야 아버지의 말에 담긴 고통과 희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흐름을 잇대어 가면서 미래로 나아가는 시간의 새로움을 말한 것이었다.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시간이 인간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고, 그 시간 위에서 무너진 삶을 재건하고 삶을 쇄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강물은 미래로 향하는 시간이었다.





서민들의 사실적이고 세부적인 표현들은 한결같이 나약하고 슬프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인 '먹고사는 일' 조차도 전투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로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유일한 보호장치다.  한 가지 더 있다면 대다수가 서민들이라는 위로도 있긴 하다.



가난을 경험한 자만이 '가난'을 논할 수 있고 어려움을 세밀히 다룰 줄 안다.  치밀한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이번 '허송세월' 산문집은 이러한 삶을 통과한 작가가 한층 깊고 무거운 마음으로 그렇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말하는 글이다.  그는 그럼에도 좌절하지도 말고, 무심히 살지도 말고, 죽음을 선택하지도 말고 살아서 채울 수 있는 최선의 몸짓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노화의 속도를 실감하는 글을 읽을 때는 나이대에 드러나는 보편적인 노화현상을 겪는 정도로 이해했는데, 팬더믹 시절 심장질환으로 혼수상태까지 갔었다는 글을 만났을 때는 많이 놀랐다.  사후세계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공간을 넘나들고 돌아와 삶의 경이로움을 논하는 글을 읽을 땐 독자로써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죽음이란 예고 없이 닥치지만 익숙한 반응이 쉽지 않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그는 '죽음'을 경험하고 삶의 존귀함을 느끼며 조금은 편안해진 듯 보였다.  수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얻은 독서로 얻은 그의 성찰을 전했는데, 변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현재 변할 수 있을 만큼의 요구로 나는 들렸다.  '난세의 책 읽기'라는 산문을 읽을 때는 그의 절망이 느껴져 가슴이 아팠다.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저무는 저녁에 허균, 차천로, 김득신의 독서를 생각하는 일은 슬프다.  독서는 쉽고 세상을 헤쳐 나가기가 더 어렵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상살이는 어렵고, 책과 세상과의 관계를 세워 나가기는 더욱 어려운 데, 책과 세상이 이어지지 않을 때 독서는 괴롭다.  허균은 책 속의 길과 세상의 길을 이으려다가 죽었고, 김득신은 책 속의 길과 세상의 길을 끊어 놓고 죽었고, 차천로는 북경 성관의 '인정'을 받으면서 죽었다.


세상의 길과 이어지지 않는다면 책 속에 무슨 길이 있겠는가.  나는 김득신과 책과 화적의 밥 사이를 건너가지 못한다.  나는 밤에는 책을 읽지 않는다.





다가오는 노화의 불편도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저자의 편안함이 맑게 들린다.  나 역시도 내가 떠난 후에 짧게만 애도하고 나와 함께 했던 좋은 추억만을 기억하며 남은 이들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는 그의 글은 큰 위로다.  다시 말해 죽음의 중요성을 최소화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서 삶을 의도적으로 냉정하고 사고하며 바라보라는 의미다.



뼛가루의 침묵은 완강했고, 범접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  금방 있던 사람이 금방 없어졌는데, 뼛가루는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나 애도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었고, 이 언어도단은 인간 생명의 종말로서 합당하고 편안해 보였다.




우리는 수많은 죽음을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기억하는 숭고한 죽음도 있고, 억울한 죽음도 있다.  저자는 죽음으로 가는 열차 속에 탑승한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느 순간 조용히 잊힌 불편한 과거의 되새김질이지만 잊히지 않도록 계속해서 거론해야 할 사명처럼 읽혔다.   가깝게 기억되는 이태원 참사, 세월호 침몰, 노동 현장에서 빈번히 벌어지는 안전사고등은 가장 기본적이고 안전한 일상을 원하는 시민들의 소박한 소망일 뿐이었다.



갈수록 서민물가는 오르고 외식하기가 부담스러운 먹고살기 괴로운 시절이 된 것 같다.  산업사회로 변모한 지금 이제 우리는 자급자족이 어려운 상태다.  물가고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모두 압도한다는 표현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필요한 만큼의 이상이 발전한 산업사회에서 아직도 노동하지 않으면 생계가 곤란한 현실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밥벌이를 위해 사회안전망이 결여된 일터로 나간다.  최첨단 신기술이 적용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에서 작업 단계를 감시하고 노동 시간을 연장시킴으로써 생산성을 향상하는 게 작업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프다.



이익을 낳는 것만이 바람직한 행위라는 시각은 위험하다.  휴머니티에 등을 돌려버린 사회이기 때문이다.  




<허송세월 / 김 훈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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