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대림역 부근에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것처럼 북경에는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왕징'이 있다. 왕징에는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프랜차이즈 음식점도 많고 모든 한국 제품을 살 수 있는 한인마트, 카페, 학원 그리고 소주를 파는 술집까지 있다! 심지어 한국에 먼저 출시된 신제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곳에서 금방 찾을 수 있으니 한국이 그리울 때는 꼭 왕징을 찾게 된다. 한마디로 왕징은 북경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사막 속 오아시스’라고 할 수 있다.
북경에 온 뒤 일주일간은 이것저것 처리해야 할 일도 많고 짐 정리도 해야 해서 무척 정신없이 지나갔다. 어느 정도 할 일이 끝나 조금 여유가 생기자마자 곧바로 돈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바리바리 챙겨 온 장바구니를 들고 룸메이트 언니와 왕징에 있는 ‘Q마트’에 갔다. 마트에 들어가자마자 보인 TV에는 소녀시대의 뮤직비디오가 반복 재생되고 있었고 모든 진열대에는 한국에서 파는 식료품들이 거의 다 있었다. 한국 에 있는 마트를 북경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 만 해도 흔하게 보던 것들인데 중국에서 보니 한국 과자 하나도 왜 이리 맛있어 보이고 신기한지 난 다시는 이 마트에 못 올 사람처럼 매운 새우깡과 고추장을 담았다. 놀이공원에 온 것처럼 마음이 둥둥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도희야, 우리 또 여기 올 거니까 진정하고 내려놔...”
광견병 지도사처럼 날 말려준 룸메이트 언니 덕분에 간신히 이성의 끈을 잡고 딱 일주일 동안 먹을 음식만 샀다. 그럼에도 장바구니는 무척 무거웠다. 겨울을 대비해 식량을 비축해 놓곤 했다던 조상님들의 마음이 뭔지 알 것만 같았다. 멀지 않은 곳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중국에 꽁꽁 언 마음이 약간 녹은 느낌이었다. 숨길 수 없는 흡족한 표정으로 기숙사로 돌아왔는데 멀리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서있는 하경 언니를 마주쳤다. 곧이어 언니는 정말 놀라운 얘기를 나에게 전해줬다.
“나도 Y 언니(하경 언니의 룸메이트)랑 오전에 왕징에 다녀왔는데, 거기에 있는 한국 프랜차이즈 빵집이 너무 신기한 거야. 그래서 정신없이 핸드폰으로 가게 사진을 신나게 찍었다? 그런 다음에 곧바로 식당에 들어가서 떡볶이를 맛있게 먹은 뒤에 계산하려고 가방을 열어봤는데…. Y 언니 지갑이 없어진 거야!”
너무 놀란 언니들은 허둥지둥 유학원에 전화를 했고 유학원에서는 침착하게 더 없어진 게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다고 한다.
“우선 침착하세요. 가방에 혹시 여권은 있나요?”
“세상에... 여권도 없어졌어요!”
지갑에 이어 여권까지 없어진 것을 알게 된 언니들은 너무 당황하고 겁이 난 상태였다고 했다. 그때 Y 언니가 받은 어느 낯선 번호의 전화는 언니들의 긴장된 마음을 조금은 풀어줬다.
“제가 지갑을 주웠는데 혹시 이 지갑 주인 맞으실까요?”
그곳으로 바로 달려가 지갑을 건네받고 꼼꼼히 살핀 뒤 한국의 은행에 국제전화로 연락해보니 이미 누가 Y 언니 카드로 60만 원을 긁고 주민등록증을 가져간 상태였다. 그 카드 옆에 있던 중국은행 카드로 결제했으면 도둑을 잡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일부러 한국 카드로 긁은 것 같았다. 도둑의 똑똑함에 우리는 크게 감탄했다. 더 잃어버린 게 있나 보던 중, 이번엔 옆 동네 치과에서 전화가 와서 바로 달려갔단다. 너무나 다행히도 그곳에서 여권을 찾게 된 Y언니.
“도둑이 여권은 버리고 여권케이스만 들고 간 것 같아요.”
그 도둑도 어지간히 마음이 급했는지 여권케이스를 버리고 도망간다는 게 여권을 버리고 여권케이스만 챙겨간 듯했다. 가뜩이나 겁이 많은 하경 언니가 전해준 이 이야기는 나에게까지 그 공포감을 전염시키기에 충분했다. 중국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이런 끔찍한 얘기를 들으니, 중국에 대해 살짝 녹았던 마음이 얼어서 오히려 더 꽝꽝 얼어버렸다. 왕징만 있으면 중국에서 죽을 때까지도 살 수 있겠다는 몇 시간 전 나의 자신감도 같이 얼어버리고 말았다.
나 이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걸까?
김도희
Ps. 저 이후로 중국 음식에 빠져 왕징에는 막상 별로 가지 않았다는 비하인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