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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Oct 08. 2024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맥주캔을 따 본 날 !

이 기분이구나!

이제 알겠다.

사람들이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하나 꺼내어서 따고 딱, 마시고 난 다음에 맛있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게 됐다. 한 모금을 들이켰는데 시원했다. 냉장고에서 방금 꺼내었으니 당연히 차가워서 시원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 시원함이 아닌, 정말 속이 시원했다. 


오전 내내 작업했었던 온라인 사이트의 반품건이 해결되고 난 뒤에 그리고 위층집 여자가 내고 있는 미칠 것 같은 층간소음소리가 나지 않자, 드디어 모든 긴장감에서 풀린 듯한 이 시원한 기분. 이 기분을 이어가고 싶어서 갑자기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맥주캔을 따고 시원한 맥주를 한 번 먹고 싶은 생각이 났다. 냉장고를 열었다. 어제 일요일에 남편이 지방에서 한 마라톤 행사에 참가하고 간식으로 받아서 먹지 않고 갖고 온 맥주캔. 


남편이 내 앞에서 펼쳐놓았던 비닐봉지에 있었던 맥주캔 한 개. 나는 그것을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내가 부침개를 부치면 남편은 가끔 반주로 술을 한 잔씩 한다. 그때 남편이 먹을 맥주캔. 그 맥주캔이 생각이 났다. 


주말 내내 찌익 - 끄윽 - 했었던 그 쇠한 소리가 들리지 않은 월요일 12시 20분 경이 되어서야 주말 내내 시달렸던 터질 것 같았던 나의 뇌 근육이 드디어 긴장감에서 해방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만끽하고 싶었다. 


조용한 공기가 너무 좋았다. 행복했다. 아무런 소음이 들리지 않은 이 조용한 평온함이, 평화가 좋았다. 안주가 좋아서 맥주캔이 생각이 났나? 푸풋^^ 웃음이 저절로 난다. 웃긴다. 


많이 먹은 것도 아닌데, 딱 한 모금 들이켰는데, 이 글을 쓰는 동안, 한 문단을 썼는데, 벌써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맥주이름은 카스다.


남편과 5월에 북해도 여행을 갔었다. 내가 준비한 여행이었다. 그때 삿포르에서 맥주를 마셨다. 나는 술 한 모금만 마셔도 금세 얼굴이 뻘게져서 나 혼자서 술을 다 먹은 사람처럼 되어버린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술을 먹지 않으려고 한다. 취기보다 먼저 올라오는 뻘건 얼굴이 꼴사납다. 그런데 그 삿포르 맥주는 구수하기도 했었고 맛도 이상하게 내 입에 착 감겼다. 나는 그 한 컵을 다 마셨는데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었다. 신기했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맥주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내가 맥주캔을 냉장고에서 꺼내어서 따고, 싱크대 앞에서 고개를 젖히고 한 모금을 들이켰다는 게 신기하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취기를 느끼면서 또 한 모금을 마셨다는 게 신기하다. 얼굴이 뻘게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약간 기분도 알싸해지는 게 느껴졌다. 얼른 욕실로 가서 얼굴을 보았다. 역시 뻘갰다. 그 캔을 다 마시면 정말 취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남은 반을 비닐로 꼭, 꼭 싸맸다. 그리고 남편이 찾을 때 줘야지, 하고 냉장고에 잘 넣어두었다. 


여러 가지로 처음 하는 게 많아진다. 

결혼하고 분가하고 28년째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빌라에서 2년) 위층에서 층간소음 내는 경우도 처음이고, 취미생활을 시작한 것도 처음이고, 집에서 나 혼자서 맥주캔을 마셔본 것도 처음이다. 55년을 살았어도 아직도 처음인 게 많네. 그런데 좋은 처음만 많아지면 좋겠다. 나쁜 처음은 없으면 좋겠다. 괴로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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