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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Oct 08. 2024

여유와 불안이 공존할 때

가끔 불안할 때도 있다. 호기롭게 나는 예술가로 살 거예요,라는 말을 해놓고는 이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서 내년에 봄이 왔을 때, 여름이 왔을 때, 가을이 왔을 때, 겨울이 왔을 때 여전히 나는 돈 십 원도 못 벌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있다면 그때 내 기분은 어떨까. 출간작가 명함도 없고, 그저 지금처럼 영어회화 공부하고 있고, 전신플로우필라테스, 라틴라인댄스만 하고 있다면 나는 어떨까. 


아무것도 안 되어 있다면? 불안하다. 막연히 세월만 먹고 있다면? 

그래도 나는 건강하고, 잘 살고 있다면, 행복하다면, 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불안하다. 

내 나이가 55세일 때는? 괜찮고.

내년에 내 나이가 56세일 때는? 안 괜찮고.

그래도 뭔가가 되어 있으면 좋을 텐데. 허풍쟁이가 되어 있다면. 아주 속상할 것 같다. 


학생을 가르치는 것도 다시 시작해 볼까? 그런 생각을 몇 번이나 했지만 이상하게 하고 싶지가 않다. 다시 학생을 가르치면 또 얼마나 열심히 준비해야 되나? 이제는 열심히 준비하고 싶지가 않다. 그런데 돈을 받고 학생을 가르쳐야 한다면 다시 아주 열심히 해야 한다. 그게 맞다. 당연한 거다. 그래서 다시 안 하고 싶다. 


지금처럼 살고 싶다. 배우고 싶은 것들 하면서 또 그런 것들로 채워지는 하루가 나쁘지 않다. 결핍되었던 내 삶이 조금씩 충만되는 것 같다. 안 해봤던 것들을 하면서 조금씩은 성장해진다. 나쁘지 않다. 그런데도 뭔가 사회에서 결여된 성취감인 것 같다. 돈을 벌고 직업을 가져야 성취감이 인정이 되는 것 같다. 누가 뭐라고 한 적은 없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백수 같기도 하고, 전업주부가 왜인지? 마음에 안 든다. 


그동안 30여 년을 열심히 살아서 이제 내가 누리고 있는 지금의, 조금의 여유 있는 삶. 축복인 것 같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누구에게나 다 주어지는 여유. 그건 아니니까.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불안하다. 글쓰기를 열심히 하면 불안하지 않을까. 글쓰기를 열심히 할 때도 사실은 불안했다. 열심히 하면 미래가 보장되는 걸까. 열심히만 하면 꾸준히만 하면 되지. 그렇게 나를 안심시키면 또 며칠은 잘 굴러간다. 그래도 불안했었다. 


오늘로 겨우 이제 3개월째다. 이 시간을 갖고 열심히 했다고 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염치없는 일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앞날이 좀 암담하다. 아마 나 스스로 이 정도 재주로는 글쓰기로 돈을 벌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퇴직하고 시간이 흘러갔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평온하게, 급류를 타는 것처럼 흘러갈 때도 있었고, 유유히 흘러갈 때도 있었다. 내 마음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종잡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런 나를 지켜보면서 한숨이 나올 때도 있었고 안타까울 때도 있었고 안심할 때도 있었다. 


그러함에도 하루를 놓지 않고 내 루틴을 지켜가면서 흐트러지지는 않게 뭔가는 배우려고 뭔가는 조금이라도 나아지려고 애를 쓰기는 했었다. 그런 나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그런 나의 모습이 기특해서?


며칠 전에 남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지금처럼 잘 지내면 된다. 돈을 벌려고 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은 공부하고 지금처럼 지내면 돼."

뭔가 든든하다. 남편이 있어서.


감사하다.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그 마음이 느껴진다. 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차 안이 온기로 채워지는 듯했다. 


그래도 막연히 불안하다. <JOB>이라는 뭔가 확실한 게 없어서, 나는 불안해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돈벌이를 안 하고 있다는 게, 내가 마땅치가 않다. 내가 그동안 벌어 놓은 걸, 재미있게, 즐겁게 쓰고 있다. 내가 먹는 게 사탕이라서 충치만 생기게 되면 어떡하지? 공연히 걱정이 앞선다. 그래서 오늘도 보장되지 않는 미래를 위해서 영어회화, 불어회화로 하루를 열었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는 싶지가 않다. 시간이 흘러서 여전히 글은 쓰고 있고, 돈은 벌 생각도 안 하고 있고, 예술가는 안 되어 있고, 허풍쟁이로 남더라도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여자로는 남고 싶어서. 


지난 일요일에는 나름 재미난 가위 자르기를 했다. 일전에 무릎 바로 밑까지 올라오는 톡톡한 긴 회색 양말을 세 켤레 샀는데, 집에 와서 신어보니 양말 목이 너무 꽉 끼었다. 할인이 많이 된 제품이어서 교환도 반품도 불가한 제품이다. 누구를 줬야 하나? 골몰하다가 구두를 신었을 때 보기 좋은 적당한 길이에서 가위로 잘라 보았다. 자른 부분이 살짝 말려졌다. 나름 엣지 있었다. 자른 나머지로는 양쪽 손에 끼어보았다. 브랜드 이미지가 손목 위에 나와서 내 눈에는 엣지 있어 보였다. 엄지 손가락이 움직이기 쉽게 엄지손가락 쪽에 트이게 가위로 잘라 보았다. 날씨가 추워지면 장갑 대용으로 쓰면 된다. 다른 두 켤레도 똑같은 양말이다. 두 켤레는 길이를 좀 다르게도 잘라봐야겠다는 재미난 생각을 해보았다. 


저녁이 되었다. 지방에서 주최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고 온 남편에게 보여주었다. 바지를 둥둥 걷어붙였다. 그 양말을 신은 내 모습을 보고 살짝 말려진 게 예쁘다고, 잘 잘랐네, 칭찬을 한다. 그 한 마디에 왠지 기분이 으쓱해졌다. 흘러내리지 않고 끝이 살짝 말려져서 프렌치 한 것처럼 보이는 걸 딱, 보고는 알아채리는 남편, 역시 패션에 센스가 있다. 참고로 그 양말은 남편이 사주었다. 남편이 사 준 양말을 예쁘게 신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덤으로 장갑까지 생겼다 ^^ 내 얇은 손목에 딱 맞는데, 늘어질 수도 있으니, 남편 것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오늘은 10월 8일이다. 내일은 10월 9일 한글날이다. 그리고 나의 브런치북 작가 생활 4개월째가 시작되는 날이다. 좀 더 분발해야겠다. 이번 3개월째, 한 달은? 성큼성큼 올라가다가 잠시 힘에 부쳐서 계단에 앉아 바람을 쐬며 잠시 쉬었다. 이제 쉬었으니 또 좀 힘을 내봐야겠다. 그래도 걸어가면 뭐라도 나오겠지. 마지막 끝에서는 잘 살았다, 하고 웃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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